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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gweon Yim Nov 14. 2021

마추픽추 가는 길, 잉카 트레일 2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38

안데스가 찾아준 도봉산의 추억


포터가 텐트 문 앞에 갖다 놓은 코카 차를 마시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텐트 밖으로 나와 푸른빛을 띤 건너편 산과 황금빛의 햇살을 받은 구름을 본다. 아니 본다기보다는 감상한다는 편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깊은 산속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자본 적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텐트를 젖히고 내다본 앞산과 아침놀

중학교 시절 처음 등산부에 들어가 도봉산에서 캠핑을 하던 추억이 가물가물하다가 갑자기 현실이 되어 내 앞에 맞닥뜨렸다고나 할까. 페루의 안데스 깊은 산 중, 푸른 하늘에 뜬 아침놀을 보면서 뇌 속 깊은 저장소의 기억 한 줄기가 되살아났다.


주 가이드 마르코와 포터들이 출발 직전 모임을 갖는다

첫 번째 캠프장 와이야밤바는 해발 3400미터인데 캠프장을 떠나 이어지는 길 가의 풍경은 마치 열대우림의 느낌이 난다. 계곡을 흐르는 급류와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 숲은 길 위에 햇볕 한 조각을 허락지 않는다.


먼데 풍경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들은 짙푸른 이끼로 덮여 마치 처녀림을 헤치고 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아니 이곳은 지구라는 생명체의 기관지 속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우거진 숲에 비해서 산소의 양은 많이 부족해서 천천히 오르고 있었음에도 숨은 매우 가빴다.


나무 줄기와 가지를 덮은 이끼가 숲을 신비롭게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길을 오르다가 붉은 줄무늬의 보자기에 싸인 커다란 짐을 둘러멘 중년 여성이 앞서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이 산 중에도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나는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팀원들에 뒤쳐져서 단독 등반객이 되었다.


무거운 등짐을 지고 산 위 마을로 오르는 여인


다른 팀원들과 달리 카메라 백팩을 메고 어깨에도 무거운 카메라 한 대가 걸려 있어서 빨리 걸을 수 없는 데다가 아름다운 야생화들과 처음 만나는 풍경들을 만날 때마다 카메라를 겨누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팀의 부 가이드가 길가의 이끼 덮인 원시림 사이로 내 뒤를 따른다.

얼마나 올랐을까? 숲길을 빠져나오니 길 옆의 나무숲이 사라졌다. 시야가 확 트이는 듯했지만 길 가는 내내 숲 대신 구름이 시야를 가렸다. 먼데 산이 문득문득 나타나고는 했으나 장쾌한 안데스 연봉은 우리 앞에 시원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따금씩 구름이 갈라지면 산 아래 아득히 마을이 보이다가 또 먼데 산이 안갯속에서 겹겹이 층을 이루면서 나타나곤 했다.


구름이 갈라지면 산 아래 계곡의 마을이 보이곤 한다.


길은 즐거웠으나 일행에서 멀리 뒤처진 나는 앞서가는 일행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긴 했으나 나름 혼자 만의 산길이 즐겁기도 했다. 젊은 세컨드 가이드가 나의 안전을 위해 내 뒤를 따라왔다. 그 친구는 오늘은 온전히 나의 개인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셈이다.  내 뒤를 따르고 있지만 내가 걷는 길을 방해하는 일은 없었다. 시야에 보이지 않다가 내가 힘들어하면 갑자기 앞에 나타나서 "힘들 때는 멈추고 사진을 찍으세요"라고 했다. 그러면 "사진 찍는 것이 걷기보다 더 힘들어" 하면서 잠시 다리를 쉰다.


구름에 휩싸인 안데스 연봉


죽은 여인의 고개


지루한 고갯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안갯속에 한떼의 트래커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고개는 거기서 내리막길로 바뀌었다. 해발 4215미터의 죽은 여인의 고개라고 부르는 고갯마루였다. 죽은 여인이라는 고개의 이름은 이 고개의 능선을 멀리서 볼 때 여성의 나신이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안갯속에서 그 아름다운 곡선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죽은 여인인가? 아름다운 여인의 곡선을 보고 죽은 여인을 상상한다는 것은 어떤 심리상태에서 가능한지, 그것이 한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집단적 의식 상태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어떤 여인에 관한 전설이 있었을 것 같은데 알 수 없었다.


해발 4215미터의 죽은 여인의 고개 정상부


잉카의 회계기록창고?


잉카 트레일에서 가장 높은 이 고개를 넘으면 좀 편안한 길이 기다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안데스는 그리 녹녹지 않았다. 제법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을 한 참을 내려가서 길은 다시 내리막길만큼 급한 경사로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멀리 내려온 길이 보이고 계곡 아래에 파카이마유 캠프장이 보이고 그 위로 산꼭대기에서부터 아래로 길게 떨어지는 폭포수가 하얀 띠처럼 보였다. 4000미터를 오르내리는 고산지대라 나무가 없어 야생화들만이 안갯속에 드러났다.


캠프장 파카이마유

파카이마유(Pakaymayu) 캠프장이 내려다보이는 고갯길 중턱에 돌로 쌓은 초소처럼 보이는 유적이 있었다. 탐보 룬쿠라카이라는 건물터이다. 탐보는 이런 류의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고 룬크라카이는 지금 오르고 있는 산 이름이다. 이 높은 산고개의 이름은 룬크라카이 패스라고 하며 고개 정상은 해발 3950m이다.  


구름과 동행하는 룬크라카이 패스

유적은 해발 3750미터의 급경사진 산 중턱에 지어진 이 건물은 벽체만 남아 있었다. 장방형과 원형의 두 건물을 아래 위로 세웠는데 장방형 건물의 산을 내려다보는 벽체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서 산 밑을 감시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탐보 룬크라카이 유적의 아래쪽 석축 건물


이러한 형태의 건물을 탐푸 또는 탐보라고 한다는데 잉카제국의 중요한 군사시설로 보급물자를 운송하는 사람들의 숙소로서의 역할도 했고 당시의 키푸를 기반으로 한 회계기록을 보관하는 장소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역원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된다.


탐보 룬크라카이 유적의 아래쪽 장방형 건물 터

키푸(quipu)는 안데스 지역에서 많이 사용하던 끈에 매듭을 만들어 기록하는 방법이다. 매듭을 한 끈 형태의 회계기록을 이런 깊은 산중의 군사시설에 보관한다는 것은 그 기록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하겠다. 이 유적은 안동 근처의 우리나라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태백산 사고를 생각나게 했다.


탐보 룬크라카이 전경
탐보 룬크라카이 유적과 구름에 싸인 맞은편 산이 수묵산수화처럼 아름답다.

사슴이 쉬어 가는 깊은 산 작은 호수


룬크라카이 유적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해발 3900미터 근처에 작은 호수가 하나 있다. 쿠차파타라고 부르는 이 작은 호수는 안갯속에 숨어 전모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렇게 높은 산에 습지가 형성되어 있고 작은 호수까지 있다는 것이 산 자체를 무척 신비롭게 연출한 듯이 생각되었다.


이곳은 사슴이 많이 산다고 하는데 이 호수에 사슴이 내려와 물을 마시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아름답기 짝이 없다. 과거에는 캠프장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금지되고 있다 한다.



해발 3900미터의 쿠차파타 호수

룬크라카이 고개를 넘어서면서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천근인지 만근인지 모르게 무거워진 다리를 천천히 옮겨 앞선 팀원들이 갔을 길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아마도 시간 반은 더 늦었으리라 생각되는데 그렇다고 서둘러 갈 형편도 아니니 그냥 지금까지의 페이스를 유지한 채 걷기로 했다.


캠프장에는 내 텐트도 설치되어 있었고 식탁에 밥도 차려져 있었으나 밥 먹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대로 침낭 속으로 들어가 곯아떨어졌다.


해는 지고 두터운 안개 담벼락을 배경으로 이끼에 싸인 나무줄기가 길가는 사람을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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