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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소도 Oct 18. 2023

암에 걸려도 바뀌지 않는 것

나는 약을 잘 먹지 않는 편이다. 일부러 챙겨 먹지 않는 건 아니다. 그저 '약'이라는 개념이 내 의식 안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진짜 죽겠다 싶은 정도가 되어야만 나 스스로 약을 찾아 먹는.


방송국을 그만두고 다녔던 첫 번째 회사에서는 스트레스가 컸다. 일에 대한 것 보다도, 기본적인 이치를 벗어나는 것들에 대한 스트레스였다. 회사 재정을 엄한 곳에 남발한다던가, 일은 안 하면서 정치 놀이나 하는 것 따위가 주된 요인이었다. 


고약한 성질머리 덕분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두통이 바로 찾아왔다. 그럴 때 챙겨 먹는 타이레놀이나 봄이면 꽃가루 때문에 먹는 알레르기약 한 두 알 정도가 내가 찾아먹던 약의 전부였다. 간혹 병원을 찾더라도 처방받은 약을 이틀 이상 이어 먹어본 일을 손에 꼽을 수 있었다. 


눈앞에 약이 있어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지금 이 급한 것부터 하고 먹으려다 보면 약 한 알이 그 자리에서 며칠씩 방치되었다. 영양제 몇 통을 그렇게 내리 버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암환자가 되고 나서 인생이 달라질 줄 알았다. 이제 전과 같은 생활패턴으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도 하고 약도 잘 챙겨 먹고 마음을 편히 먹으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무섭도록 같았다. 진단을 받자마자 녹즙을 좀 해 먹어 보려고 산 녹즙기는 한 달도 못 돼서 찬장 안에 처박혀버렸다. 오직 내 한 사람 입에 넣겠다는 의지로 야채를 씻고 다듬어 먹어지지가 않았다. 


아는 분께서 어렵게 채취해 구하셨다는 상황버섯 환도받았을 때의 감사한 마음과 달리 잘 먹어지지가 않았다. 프로폴리스도 그 역겨운 냄새 때문에 몇십 통이 그대로 찬장에 박혀있다. 의지를 내고 내고 내야만 한번 먹을까 말까 한 일이 되었다.


운동은 하기만 하면 기분이 좋았지만, 운동화를 신고 나서기까지가 어려웠다. 진단을 받으며 결심했던 이상적인 라이프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여전히 식습관도 바뀌지 않았고, 약도 잘 챙겨 먹지 않는다.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작은 것에 화내고 스트레스받는다.


내가 나를 보면서 인간의 변함없음에 탄복스럽다. 사람이 죽을병에 걸려도 이렇게 바뀌지를 않는구나 싶다. 겁이 없는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다. 가끔은 나 스스로도 나중에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하려는지, 죽어도 할 말이 없겠다 싶어 진다. 




아이 둘을 출산하며 늘 혓바늘과 입병을 달고 살았다. 입병이 한번 나면 일주일 넘게 이어졌고 며칠 괜찮았다가도 다른 곳에 솟아올랐다. 


그런 내가 얼마 전부터 혓바늘에서 해방되었다. 수시로 헐던 잇몸도 안 아픈지가 꽤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신랑이 챙겨 먹여주기 시작한 비타민을 먹고 나서부터였다. 내가 하도 약을 먹지 않으니 말로만 권하다 지친 신랑이 직접 먹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가끔은 그마저도 귀찮다. 있다가 먹겠다는 말이 콧구멍까지 올라올 때도 있지만 꾹 참고 먹었다. 그렇게 두 달, 세 달이 넘어가기 시작하니 입 안에 변화가 생겼다. 이래서 사람들이 영양제를 챙겨 먹는구나 싶었다.  


내 몸은 내가 챙겨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어리석다. 내가 그토록 바라는 함께 오래 살기 위해서는 시급한 일인데도 말이다. 사람 하나가 변하는 건 천지가 개벽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만큼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일의 나는 좀 더 낫기를 바란다. 건강한 것을 먹기 위해 애쓰고 조금이라도 더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것이 바람으로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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