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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나라의 어른이 Sep 01. 2021

파레토 법칙, 세상을 쓸모 있음으로만 판단하는 편견

다수의 ‘무가치한 것들’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소수의 가치들

 

 파레토 법칙은 1906년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소득 불균형 문제를 분석하면서 내놓은 이론이다. 결과의 대부분(80%)이 일부 원인(20%)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파레토 법칙 또는 80:20 법칙이라고 한다. 이를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 조셉 주란이 ‘파레토의 법칙’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개미를 관찰하다가 그중 20%만이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하고 인간사회 역시 이와 비슷해서 "이탈리아 인구의 20%가 전체 부의 80%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80: 20 법칙을 주장한 것이다.  소수의 인풋이 다수의 아웃풋을 낳기 때문에 결과의 80%를 생산하는 20%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쓸모 있는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집단은 소수이지만 성과물은 다수의 기여보다 훨씬 크다는 주장은 마치 공리론이 ‘유용성과 다수의 이익’이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했던 편견과도 유사하다.  이 법칙은 막 사회에 나선 이후 여러 강연 등을 통해 여러 번 들어왔고 당시에는 쉽게 납득되었던 이론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생각해 보니 이 논리에 심각한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우선은 핵심 이론으로 주장하는 관찰된 개미 중 ‘열심히 일한다’는 기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누군가의  주관적인 시각에 의한 '열심히 일함'은 관찰자 일인의 관점이다.  개미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관찰자는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였을까?   전문가에 따르면 개미사회는 각각의 고유한 역할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일개미, 병정개미, 여왕개미 등 우리가 익히 들어온 명칭만으로도 일하고 있는 개미의 모습 이면에 기능적으로 분화된 저 개미사회의 다층 구조를 이해하고 평가했었을까?   우리의 시각이 하나의 관점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이외의 것에 대해 무가치하게 여기는 어리석은 풍조를 엿볼 수 있다.

 설사 게으른 일개미의 무의미한 행동일지라도 그 행동을 징검다리 삼아 새로운 가치가 발생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도 있지 않을까?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일과 노동의 형태가 명확한 육체노동 혹은 정신노동뿐 아니라, 미술가, 가수, 코미디언 등 기초생산에 참여하지 않지만 일상을 사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깊이 공감하고 위로를 주는 가치 노동을 알고 있다.   단일한 가치 축으로 평가된 소수에 집중할 때 엘리트주의에 빠지고 이것이 온갖 사회적 불평등과 불합리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음을 쉽게 경험하고 있다.  가끔 명확한 목적과 의도 없이 행한 일로 인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상황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경험하곤 한다.  반대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했지만 전혀 다른 결과로 전환되는 모습 도 흔히 발견한다.  그래서 쉽게 판단해 버린 소수의 우월성과 그들의 성과는 다수의 ‘무가치한 것들’이 존재가 있어서 가능한 결과이다.  소수로 분류된 집단은 자부심을 넘어 과정에 참여했던 다수의 보이지 않는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의 차이는 어떤 기준으로 보는 것이냐에 따라 확연히 변화한다.  세상에서 맞는 상황은 자신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3차원을 넘어 4차 혹은 5차원 이상의 상황들의 복잡계이다.   그러므로 단축(single axis)으로 수월성(性)을 평가하고 성과를 독점하는 것은 재고해야 할 오래된 방식이다.  어쩌면 지독히도 운이 좋은 집단과 그 반대의 상황에 있었을 뿐.


 어느 날이던가 아침식사 중에 다랑어과의 생태를 조사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화면의 비친 수많은 다량 어종류 그림을 보고 아내는 ‘어느 것이 제일 맛있을까?’라고 질문했다. 우리에겐 일상적인 질문이었지만 생명체인 다랑어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가치'를 인간의 '맛' 기준으로 평가되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어떤 기분일까? ‘라는 반문을 했다.  물론 다랑어가 그렇게 느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질문은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자신의 관점으로 대상(인간)을 바라볼 때 어떤 가치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대상이 갖는 정체성과 가치가 다르게 평가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대상이 느끼는 자신의 존엄을 때로는 침해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상대를 내 가치로 바라보는 것은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개인 존중의 관점을 떠나 비인격 대상의 생명체나, 혹은 자연 또는 인공물에 대한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한다면  다른 가치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관점을 다양화하여 얻는 뜻밖의 경험도 가능하지 않을까? 

 참고로 참치는 아가미를 통해 물속의 산소를 얻게 되는데 특이하게도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이 없어서 자신이 헤엄치면서 유입되는 물을 통해 얻어야 한다.  고등엇과도 유사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런 어류들은 항상 쉬지 않고 헤엄쳐야 한단다.  멈추지 않아야 하기에 가수면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그들의 특성에 대해 ‘성질이 급해서 혹은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라고 단정해버리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    

 오래전에 읽었던 황대권 씨의 ‘야생초 편지’와 ‘고맙다 잡초야’에서 사람들이 단 하나의 범주로 묶어버린 ‘잡초'의 가치에 대해 그간 나의 무지를 일깨워 준 아래의 설득은 이런 생각에 용기를 준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유실수와 관상용 꽃에만 이름을 붙이고 나머지는 잡초로 보는 것은 이미 관점이 편향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다른 시각으로 보면 그 잡초는 척박한 땅의 굳은 흙들을 잘게 부숴놓고 죽고 살기를 반복하여 유기물질을 끌어들여 보드랍고 영양이 많은 흙으로 만드는 농사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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