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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은 더디게 시작되었다.
입김이 계속해서 나오는 추운 날들이 이어졌지만 사람들의 옷이나 거리의 풍경은 아직 가을의 흔적을 붙잡고 있었다.
어른은 그 겨울의 문턱에서 작은 집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비워져 있던 그 집은 기억보다 작았다. 얇은 창틀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유리창에 아침마다 성에가 내려앉았다. 두꺼운 나무로 단정히 짜여진 마루는 발디딜때마다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먼지 냄새가 엷게 베여있는 현관앞 신발장은 잘못 접은 시간을 욱여넣은 듯 격자를 맞추지 못한채 뒤틀려 있었다.
짐을 풀었다. 짐이라봐야 이불 한채, 컵 하나, 책 몇 권이 다다.
얇은 유리창 밖으로 벌거벗은 나무들과 옅은 하늘, 가끔씩 흔들리는 이름모를 들풀들이 보였다.
작은 집은 조용했다.
아이와 만난 건 그 즈음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확실치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방 안에 아이가 누워 있었다.
당황스럽지도, 놀랍지도 않았다.
그저 그런 계절이었고, 그저 그런 장소였다.
아이는 말이 없었다.
이름도 묻지 않았다. 나이도, 사연도, 이유도 묻지 않았다.
어른과 아이는 서로 조심스러운 예의를 주고받았고 한 공간 안에서 일상의 리듬을 조율해 갔다.
아이는 늘 방에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거나, 바닥에 엎드려 뭔가를 그리거나, 간혹 얇은 유리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어른은 그런 아이를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조용한 존재가 방 안의 공기를 정리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먼지투성이였던 시간이 아이를 중심으로 희뿌연 기억을 털어내고 있는듯했다.
어느 날 어른은 아이의 침대 곁에 앉았다.
아이의 얼굴 아래로 오래된 베갯잇이 눈에 들어왔다.
"이 방, 마음에 들어요."
그날 처음으로 아이가 말을 걸었다.
어른은 천천히 고개를 아이 쪽으로 돌렸다. 아이는 침대에 누운 채 창밖을 보고 있었고 그 얼굴은 마치 꿈속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처럼 평온하고 멀었다.
"추운데?"
어른은 그렇게 되물었다.
아이는 가볍게 웃었다.
"그래서 더 좋아요. 사람은 따뜻한 데서 거짓말을 많이 하거든요."
그 말이 방 안에 잠시 떠돌았다.
어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 어딘가에 오래 묵혀둔 감정이 그 말에 부딪혀 잔잔히 흔들리는 걸 느꼈다.
그날 어른은 처음으로 아이가 낯설게 느껴졌다.
어린 얼굴이지만 그 말투나 눈빛은 어딘가 익숙하고 또 너무 멀었다.
"서로 다른 페이지에서 살아서 그래."
유난히 조용했던 그 겨울은 침묵에 수렴하고 있었다. 눈이 오지 않는 하늘은 텅 비어있었다. 이따끔 희끗하게 하늘이 변하기도 했지만 눈은 오지 않았다. 겨울빛은 낮고 무겁게 내려앉았고 소리는 무거운 담요처럼 눌려 퍼졌다.
어른은 방 안에 있었다. 벽에 기대놓은 시계는 무심하게 초침을 옮겼다. 딱, 딱. 그 고른 소리가 시간을 일정하게 나눴다.
아이의 목소리가 내게 닿았다.
"서로 다른 페이지에서 살아서 그래.
한명은 이미 어린 시절을 지나가 버려서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한명은 아직 어른의 시절을 살아보지 못해서 알지 못하고."
어른은 아이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돌리려다 말 속에 걸려 더 이상 아이쪽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방안의 풍경은 너무 차분하고, 너무 정확했다. 이 순간보다도 더 오래된 기억이 아이의 입을 통해 빠져나오고 있었다.
"너도 아이잖아." 어른은 조심스레 말했다.
그 말은 질문 같기도 했고 확인 같기도 했고 무너지는 말 같기도 했다.
아이는 고개를 들지 않고 그대로 말했다.
"난 특별한 능력이 있거든.
어린 마음은 내가 아이니까 아는 거지만,
어른의 마음도 알아. 그게 내 능력이야."
오래된 베갯잇 위에 놓인 아이의 얼굴이 그 말과 함께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어른은 순간적으로 그 얼굴이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아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눈동자의 깊이나 말의 톤, 호흡의 리듬이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익숙하지만 낯선. 기억나지만 불확실한.
그 순간, 어른의 안에서 작은 균열이 일었다.
겨우 손톱으로 벽지를 긁은 듯한 균열.
그러나 그 틈새로 무언가 알수 없는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른은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 말... 어디서 들었니?"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늘게 눈을 감았고, 조용히 숨을 들이 마셨다. 이불 아래의 몸이 살아 있다는 확신조차 희미해지는 정적 속에서 어른은 고요함에 휩싸였다.
어른은 이 방은 지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의 방이거나, 내일의 방이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어느 겨울의 방.
그리고 아이는, 아니, 아이 역시, 있었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조용히 어른 안에서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른은 더 묻지 않았다.
말을 하면 무너질 것 같은 균형을 어른은 감지하고 있었다.
어른은 이불 끝을 조심스레 당겨 아이를 덮어주고 오래전 어떤 꿈에서 돌아온 기분으로 천천히 등을 돌렸다.
겨울이 드디어 하늘 가득 눈을 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