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정전 사태의 원인과 교훈
영어 표현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Be in the same zip code
생각이나 태도가 같은지 확인할 때 "I just wanted to make sure we are on the same page."라는 식으로 은유적인 표현을 많이 쓰는데, 약간은 비슷한 맥락이지요. 미국에서는 위치에 대한 정보를 우편번호로 인식하곤 하거든요. 그래서 이웃에 대해 말할 때도 "They might share the zip code with you, but you don't really know them. (같은 우편번호를 쓸지는 몰라도 이웃을 제대로 아는 건 아니죠.)"라고 말하든가,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기사에서 "He's rarely in the same zip code as Truth. (그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라는 식의 표현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우편번호는 인구와도 관련이 깊어서, 대도시의 경우 면적은 작더라도 우편번호가 아주 많고요. 시골의 경우 우편번호 한 개가 커버하는 면적이 아주 큽니다. 아래 지도를 보면, 같은 워싱턴주지만 대도시인 시애틀의 경우 한 우편번호를 쓰는 면적은 넓지 않고, 조금만 교외로 벗어나도 훨씬 큰 면적을 차지하는 걸 볼 수 있지요. 중서부 산골 같은 곳은 사람이 별로 살지 않으니 엄청 광활한 지역도 우편번호 한 개를 쓰곤 하죠.
웹사이트에서도 서비스를 이용하기 전 우편번호를 입력하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고요. (요즘 한국도 다섯 자리 우편번호로 체제를 개편하면서 전보다 우편번호에 의미가 좀 더 부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전력 회사 웹사이트도 마찬가지예요. 아래 이미지처럼 살고 있는 곳의 우편번호를 입력하면 지역에 맞는 정보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즉, 우편번호는 주소 전체를 길게 쓰는 대신 사용할 수 있는 고유의 좌표라고 할 수 있죠.
미국의 전력 시스템, 그리고 텍사스 사태
왜 갑자기 남의 나라 우편번호 얘기를 좔좔 늘어놓았냐고요? 사실 우편번호에 대한 이야기는 미국 전력 시스템이 얼마나 분산되어 있나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리베이트 정책에 대한 글을 쓸 때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전력의 생산과 송, 배전, 고객 서비스까지 모두 한전이 담당하고 있지요.
그렇지만 미국에는 한전에 해당하는 기관이 없습니다. 발전 자체도 수천 개에 달하는 협동조합이나 민간, 공영 전기사업자가 담당하고 있고, 규제도 연방과 주 차원에서 이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요. 전력망은 서부, 동부, 그리고 텍사스 연계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서부는 서로 연계가 되어 있지만 텍사스는 이 두 망과는 연계되어 있지 않고 멕시코 일부 지역과만 연계가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텍사스에 엄청난 한파가 닥치며 대규모, 장기간 정전 사태가 일어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죠. 아니, 원래 텍사스 하면 따땃한 날씨에 스테이크 뜯어먹는 카이보이가 생각나는 곳 아니었나요? 한파라니, 대체 이게 무슨 멍멍이 소리죠?
일각에서는 텍사스에 한파가 온 이유를 기후변화 때문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북극 한파인 극소용돌이(Polar Vortex)가 불안정해지며 북반구로 내려오면서 한국도 시베리아만큼 추워진 적이 있는데요, 같은 원인이라는 거죠. 하지만 아직은 백 퍼센트 기후변화 때문이라고는 단정 짓기 어려운 시점인 듯합니다. 학자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있으니, 차차 밝혀지겠지요.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그보다 중요한 질문은 "날씨 좀 추워졌다고 왜 그 정도의 참사가 빚어졌나"일 겁니다. 일단은 너무 추워져서 전력 수요가 급등한 탓이 제1의 원인입니다.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텍사스 전력망의 전력 도매가격은 10,000% 이상이나 치솟았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수요만이 원인이 아닌 것이, 공급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전력 공급에 왜 차질이 생겼을까요? 이번에 일부 보수 정치인들은 재생에너지가 정전의 원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는데요, 그 이유는 텍사스가 다른 주에 비해 풍력발전을 상당히 많이(25%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책으로 기껏 재생에너지에 투자해서 열심히 이용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런 사태로 이어지니 회의론이 마구 나오기 시작했죠. 실제로 텍사스답지 않은 한파에 풍력발전기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해요. 빙글빙글 돌지를 못하니 전력 생산을 못한 건 당연하지요.
하지만 사실 더 큰 원인은 화석 연료인 천연가스였습니다. 미국에서는 최근 천연가스 발전 비중이 무척 늘었는데요, 탐사 기법이 발전하고 프래킹 기술 등으로 인해 추출 가능한 천연가스 보유량이 늘었기 때문에 가격이 많이 싸진 까닭이지요. 그런데 날이 추워져서 천연가스정(natural gas well)이 얼어붙었고, 가스를 이동시켜야 하는 파이프마저 얼었다고 해요. 이 와중에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가스 난방을 하는 경우 가스에 대한 수요는 확 늘었으니 천연가스 부족이 극심해졌죠.
이번 정전 사태 동안 천연가스 발전량 손실이 풍력에 비해 5배나 되었다니, 풍력 발전을 탓하면 안 되겠죠.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 추운 날씨 때문에 급등한 수요 속에,
- 주요 발전원인 천연가스 생산과 유통이 마비되고,
- 보조적으로 풍력발전기도 작동하지 않고
- 보유한 석탄마저 얼어붙은 것
... 이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위에 언급했듯 텍사스는 전력망이 다른 지역과 연계되어 있지 않은 외로운 주인데요, 그래서 이웃한 주들에게 "SOS! 전기 좀 보내줘, 나 죽어!"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 사태를 더 악화시켰습니다. 블룸버그도 텍사스를 "고립되어 있기로 악명이 높다(notoriously isolated)"라고 부르기도 했죠. 텍사스 주의 별명이 괜히 "Lone Star (외로운 별)"가 아닌가 봅니다.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
그래서 이번 텍사스 사태는 미국 전력 시스템이 안고 있는 기존의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어요. 요즘 천연가스 발전도 늘고 가스 시장은 완전히 자유로운 반면, 전력시스템은 분산화되고 인프라도 노후화되고 있죠. 주 간 전력거래도 활성화되어있지 않고요. 스마트 그리드, 전력시장 통합, 수요 반응 등 최근 대두되는 이슈들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이유가 되겠지요.
그리고 저는, 이번 텍사스 한파가 꼭 백 퍼센트 지구온난화 때문이 아니라고 밝혀진다고 해도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준다고 생각해요. 아마 극단적 기후 상황은 앞으로 점점 늘어날 텐데, 20세기에 지어진 현재의 인프라가 무방비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텍사스는 늘 따뜻했기 때문에 발전소에서 추위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못한 것이니까요. 이번 사태뿐만 아니고 캘리포니아도 여름에 극단적인 더위 때문에 정전된 적이 몇 번 있는데, 텍사스보다는 규모도 기간도 적었지만 비슷한 맥락이었죠. 서부에 위치한 캘리포니아의 경우 다른 주에서 전력을 사 올 수 있기는 했지만, 이웃 주들도 같은 히트 웨이브를 겪느라 결국 원활히 전력이 공급되지 못했습니다.
기후변화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충격을 줄까요? 우리 사회는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