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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Aug 27. 2024

한 번도 멈추어본 적 없던 사람

< 멈춤을 멈추려 합니다 - 김호섭 >

⭕ 라라 크루 <금요 문장 : 금요일의 문장 공부 > 2024.08.23.

[오늘의 문장] - <책만 보는 바보>, 안소영

사람들은 그저 눈으로 책을 읽는다고 한다. 그러나 책과 사람의 마음이 만나는 통로가 어찌 눈뿐이겠는가? 나는 책 속에서 소리를 듣는다. 머나먼 북쪽 변방의 매서운 겨울바람 소리, 먼 옛날 가을 귀뚜라미 소리가 책에서 들린다.


[나의 문장]

사람들은 그저 손으로 글을 쓴다고 한다. 그러나 글과 작가가 만나는 통로가 어찌 손뿐이겠는가? 작가는 글 속에서 끊임없이 걷는다. 걸으면서 본다. 오래된 공원, 삼치구이집, 까치, 그리고 작가 자신.


[나의 이야기]

아프고 힘들었던 과거 한 페이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 과거를 끌어안고 사는 방법은 저마다 다릅니다. 절망과 한탄으로 점철된 삶을 사는 자, 과거는 과거대로 던져두고 미친 듯이 달려가는 자, 과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허우적대는 자, 내 인생 돌려내라며 다른 사람 붙잡고 늘어지는 자....

걷는 자, 쓰는 자가 되어 '멈춤'을 멈추겠다는 작가가 있습니다. 작가 자신처럼 길 잃은 사람들에게 전하고픈 이야기가 있다며 책을 냈습니다. <멈춤을 멈추려 합니다>의 김호섭 작가님입니다.


대기업 출신, 외국계 IT회사 임원, 억대 연봉, 성공한 인생을 살던 작가님에게 마음과 몸의 고통은 한꺼번에 들이닥쳤습니다. 절망의 늪, 무기력의 바다에서 끝도 없이 허우적대며 보이지도 않는 대상을 원망하고 소주잔에 얼굴을 박고 잠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가 선택한 것은 걷기와 쓰기였습니다. 낯설었지만 걷고 또 걸었고, 부끄러웠지만 쓰고 또 썼습니다.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에게 걷고 쓴다는 것은 무기력에서 해방되고 절망에서 탈출하기 위한 처절한 날갯짓이었습니다.


아픔을 대하는 슬기로운 태도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무 노력 없이 전 자동으로 체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그 순간마다 치열하게 몸과 마음의 신호를 알아채고 제대로 교정하고 응답하는 순환의 과정에서 얻게 될 것이다. 이는, 더 넓고 깊은 지혜와 연륜의 호수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겠다.
(P66)


작가는 '걷고 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제 눈에는 작가의 다른 모습이 포착됩니다.


보는 사람

작가는 끊임없이 봅니다. 무엇이든 봅니다. 어두운 천장, 낡은 방구석, 산, 꽃, 새, 눈, 햇살, 공원, 새끼 고양이.... 그리고 그 끝엔 사람이 있습니다. 공원에서 에어로빅 추는 사람, 배팅 볼 치는 사람, 요구르트 배달 여사님, 팔순 중반의 어머니... 하지만 결국 작가가 보고 싶던 건 작가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을 이리저리 뜯어보다가 안 되겠는지 급기야 전지적 OO시점으로도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렇게 찾아낸 '승기, 과묵, 아야, 허당, 헤롱, 발랄, 생생, 선미 언니'라는 이름의 여러 김호섭을 찾아냅니다. 이렇게 집요하게 자신을 찾아내는 사람을 이제껏 본 적이 없습니다. 작가는 얼마나 맹렬히, 얼마나 치열하게 걷고 보았을까요. 살기 위해.


명랑한 사람

그런데 그런 작가의 치열함이 꽤 유쾌합니다. 눈길에 미끄러지고 뼈마디가 아플 때조차 한 문장을 남깁니다.

"꽈당이 일상이요 허당이 생활이다."

"반듯이 허리요 인생이 삐끗이다."

헌팅당한 이야기, 요구르트 여사님 때문에 설렜던 이야기를 맛깔나게 풀어놓으면서 스리슬쩍 글과 사랑하겠노라 물타기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어느새 작가의 아픔 따위는 잊고 함께 깔깔거리게 됩니다. 작가님의 명랑함은 어둠을 감추기 위한 방어막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기어코 살아낸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해맑음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

화사롭고 향기로워서 '꽃중년'이라는 단어를 가장 좋아한다는 작가는 걷다가 본 모두를 사랑합니다. 그 사랑을 글로 씁니다. 글을 쓰고 나면 그 사랑의 에너지는 자신을 향합니다.

"사랑해."
꺾여버린 내 삶을 어루만지고 보듬고 기어이 살아낸 나에게
(p245)

 걷기는 나를 살린 선명한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역사를 쓰고 무늬를 짜며 계절을 지나갑니다. 걷다 보니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니 쓰게 됩니다. 쓰려면 생각해야 하니 다시 걷습니다. 나는 요즘의 이런 내가 참 좋습니다.
(p162)


작가님이 삶에서 걷고 쓰는 행위를 어떻게 소비하는가를 보면서 '나에게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소비한다'라는 표현이 죄송할 만큼 김호섭 작가님에게 걷고 쓰는 일이란 삶 자체였습니다. 과거를 어루만지고 현재를 즐기며 미래를 꿈꾸기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걷고 쓰는 사람. 책에서 종종 언급되는 '라라크루'에서의 글쓰기를 사랑하지만, "치열함은 차라리 말이 없으니 이 진공의 시간을 메우는 건 묵묵함"이라며 혼자만의 글쓰기에도 충실한 사람. 멈춤을 멈추고 싶다지만 실은, 살면서 한 번도 멈추어본 적이 없던 사람.

저는, 작가님의 걷기와 쓰기 그리고 사랑을 응원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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