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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n 11. 2020

폭탄 계란찜은 아니었지만...

어떤 특정 음식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떡을 보면 엄마가, 보쌈김치나 제사 후 남은 전으로 끓인 김치찌개를 보면 아빠가 생각나는 것처럼 말이다. 계란찜을 보면 돌아가신 시이모님이 생각난다. 불과 10년 남짓 인연을 맺었던 분인데도 말이다.


시댁에 갈 때면 늘 큰이모님이 계셨다. 네 자매의 맏이인 이모님은 어머님과의 많은 나이차 때문에도 그랬지만 어머님 댁에 자주 기거하시며 살림을 도와주신 탓에 가족들에게는 외할머니 같은 존재였다. 아이 다섯을 혼자 키우기 버거우셨던 어머님에게 힘이 되어 주셨고 다섯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곁을 내어주셨다.

당신의 남편은 6.25 때 돌아가셨고 하나뿐인 아들은 어렸을 때 앓은 소아마비 때문에 평생 불편한 몸으로 살아야 했다.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열심히 공부한 이모님의 아들은 연구직 공무원도 되었고 결혼도 했지만 아이를 갖지는 못했다. 남편과 자식의 불행을 끌어안고 사셨지만 늘 밝고 유쾌하셨던 분. 자상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분이다.


시댁 부엌에는 어머님과 함께 늘 이모님이 계셨다. 국 하나를 끓여도 김치를 버무려도 늘 두 분이 함께하셨다. 하지만 요리 철학은 서로 달라 가끔씩 투닥투닥하셨다. 어머님은 조미료를 사용하거나 김치에 설탕을 넣는 일을 질색하셨고, 이에 반해 이모님은 요리 맛을 살리려면 조금씩은 사용해도 된다며 어머님 몰래 찬장 깊이 숨겨둔 미원이나 맛소금을 살짝씩 넣으셨다. 나박김치의 맛이 안 난다며 설탕을 풀어넣으시곤 했는데 어머님은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내시고는 했다. 그러면 두 분 다 각자 나를 붙들고 뒷담화를 하셨다.

"또 넣었네, 또 넣었어! 그렇게 설탕 좀 넣지 말라고 했는데!"

"너네 엄마가 저랴~ 성격이 지랄 맞아~"

그렇게 복닥 복닥 하시는 모습도 정겹던 시절이었다.


자신의 부엌이고 모든 음식이 본인 손을 거쳐야 안심이 되던 시어머님이셨지만 이모님의 몇 가지 요리만큼은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으셨다. 바로 들깨 찌개와 계란찜이었다. 들깨가 잔뜩 들어가 걸쭉하고 구수한 찌개도 일품이었지만, 바닥이 잔뜩 탔는데도 타는 냄새 없이 맛깔났던 계란찜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특별할 것 없는 계란찜이었다. 당근이나 양파 등의 채소가 잔뜩 들어간 것도 아니요 요즘 식당에서 주는 폭탄 계란찜처럼 비주얼이 끝내주는 것도 아니었다. 약간의 쪽파나 뿌린 듯 안 뿌린듯한 고춧가루가 전부였는데... 다만 달걀을 풀 때, 어머님이 어디 있나를 은밀히 확인한 후 찬장 저 안쪽에서 쓱 꺼낸 맛소금을 무심히 한 숟가락 툭 넣어주었던 것. 그게 비법이라면 비법이 아니었을까...


"이모님~~ 너무 맛있어요~ 어쩜 이렇게 계란찜을 맛있게 하셔요?"라고 하면 늘 이렇게 주문하셨다.

"암 것도 안 넣은 게 뭐 그리 맛있누? 그럼 나 양념통닭 한 마리만 사주쇼~"

계란찜과 맞교환을 원하셨던 양념통닭. 어느 누구 하나 사주는 이 없다며 나에게 사달라고 하셨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러고 보니 계란찜뿐 아니라 양념통닭을 먹을 때도 이모님이 기억나는구나...


외식업에 종사하는 남편은 사람들이 느끼는 '맛'이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맛이라는 건 굉장히 주관적인 거야. 맛집이라고 소문난 곳도 누구와 어떤 기분으로 먹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거든. 결국 맛을 좌우하는 건 분위기, 함께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거지. 혀가 아니라 뇌가 판단하는 거야."

밖에서 먹는 음식에는 딱 맞는 말이다. 그런데 집밥에는 다른 정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식당에서는 주방에서 어떤 이가 어떤 기분으로 이 음식을 만들었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집밥은 다르다. 누가 어떤 얼굴로 만들어주었는지, 누가 어떤 마음으로 음식을 내주었는지에 따라 맛도 기억도 달라진다.


큰 욕심도 없으셨고 당신 동생의 자식들과 손주들 밥까지 해주시며 먹는 것만 봐도 흐뭇해하시던 분. 양념치킨 한 마리만 사준다면  얼마든 해줄 수 있다는 표정으로 무심히 뚝딱 만들어주시던 계란찜.  살가운 정을 나눌 만큼 오랜 시간 함께한 분이 아니었는데도 계란찜만 보면 생각나고 문득문득 보고 싶다. 큰이모님의 계란찜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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