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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n 06. 2020

집밥 전성시대

"저 친구들이랑 고기 먹고 들어가요~"

"오늘 회식입니다~"

저녁 찬거리를 고민하는 내게 이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었다. 작은 아이 식사만 해결하면 되니 말이다. 고기를 구워주거나 찌개 하나에 밑반찬 두어 가지를 차려내기만 하면 되니 수월하다. 나 혼자라면 까짓것 굶어도 그만이고 대충 해결하면 된다. 시원한 맥주 한 캔이어도 속은 그득하다.


불과 작년만 해도 밤 12시까지 고기를 구워대던 나였다. 학교에 학원까지 돌고 집에 들어온 큰 아들은 늘 "고기 구워줘~"라고 했고, 고기 냄새가 풍겨오면 자려고 누웠던 식구들도 식탁에 나와 한 점씩 거들었다. 저녁 6시에 작은 아이 밥상 한번, 8시 반에 퇴근하는 남편을 위해 또 한 번, 12시에 귀가하는 큰아이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번 더. 총 세 번의 저녁밥상을 차렸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간 이후로 줄곧 즉, 10여 년간 2회 이상의 저녁 차리기는 지속됐다. 반찬에 메인 메뉴까지 열심히 차려놓고 들어오는 순서대로 차려내다가 반찬이 떨어지면 늦게 들어오는 가족을 위해 또 다른 반찬을 만들기 시작하는 일도 허다했다. 이튿날 아침밥까지 잔뜩 해놓았어도 아이들이 친구들이라도 데리고 오는 날이면 퇴근하는 남편을 위해 밥 짓기부터 다시 시작한 것도 여러 날. 미친 듯이 밥만 해대던 날들... 정신없이 장을 보던 날들...


아침밥 마니아였던 큰아이 덕분에 아침에도 분주한 주방이었다. 사골국물, 누룽지, 죽, 샌드위치, 바짝 구운 베이컨, 십자로 갈라 구운 비엔나소시지, 볶음밥 등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었다. 좋아하는 반찬이 나오면 밥을 두 공기도 거뜬히 먹고 등교했다. 초등학교 5학년 전교 부회장 선거를 나갔을 때, 친구들은 새벽같이 학교 정문에 나와 선거운동을 도와주고 있는데 정작 후보자인 본인은 슬렁슬렁하는 태도를 아빠가 나무랐다. 아침부터 눈물 쏙 빠지게 혼난 터라 밥도 못 먹고 등교할 것을 염려한 것은 내 큰 착각이었다. 아이는 사골국물에 밥을 잔뜩 말아 김치를 두 탕기나 먹어가며 여유롭게 식사를 마친 후 등교했다. 그렇게 아침은 반드시 먹어야 한다던 아이도 고등학생이 되니 다이어트와 거북한 속을 이유로 아침을 걸렀다. 식사는 점심 급식 한 끼와 저녁 고기만 먹기 시작했고 그나마도 친구들과 밖에서 해결하는 저녁식사가 잦아졌다. 이렇게 한 명이 집밥에서 멀어졌다.


작은 아이는 집밥 중독자였다. 어려서부터 "뭐 먹고 싶어?"라고 물으면 "집밥!"이라고 답하던 아이. 엄마의 "뭐 먹고 싶어?"라는 질문은, "네가 집밥을 먹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엄마는 네가 무언가 밖에서 먹거나 시켜먹을 수 있는 메뉴를 말해준다면 참 고맙겠어."라고 해석할 줄 모르던 아이였다. 오히려 무조건 집밥이라고 말해주어야 엄마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집요하게 집밥을 주문했다. 눈치가 없는 건가 일부러 날 골탕 먹이는 건가 싶어 김치와 김, 밥만 내주어도 만족하며 맛있게 먹는 아이였다. 그러던 아이가 이제는 뭐 먹고 싶냐는 엄마의 질문에 "엄마 먹고 싶은 거 먹자~ 회 먹을까?"라고 답한다. 엄마의 의중을 알아차릴 만큼 성장했건만 그게 왜 못내 서운한 걸까?

온라인 개학을 하던 지난 몇 달 동안, 눈뜨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던 아이를 위해 작은 트레이에 간단한 아침식사를 차려주었다. 온라인 수업을 들으면서 여유롭게 싹싹 그릇을 비워가며 잘 먹어주던 아이가 등교 개학과 함께 시원찮게 먹기 시작했다. 큰아이처럼 아침식사가 거북스러운 시기가 온건가? 남편은 "고등학생이 되면 호르몬이 변해서 아침밥을 안 먹게 되는 게 아닐까? 대부분의 아이들이 아침밥을 안 먹는 거 보면 말이야."라며 과학적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 이유야 어찌 됐건 집밥에서 멀어지는 식구가 한 명 추가됐다.


대부분의 남편들이 그러하듯 바깥 음식에 지친 남편도 집밥을 좋아했다. 주말이 되면 외식보다는 집에서 고기 굽고 찌개 끓여 간단히(?) 먹기를 희망했다. 집밥이 좋았다기보다는 집 밖으로 나가기를 싫어한 탓이겠지만 덕분에 주말이 되어도 주방에서 해방되지 못했던 시절. 이제는 그런 아내가 보이는지 주말이면 "힘드니 나가서 먹자~"라고 하거나 라면으로 간단히 해결하자고 하며 손수 끓여준다. 중년의 부부는 하루 세끼를 꼬박 챙기지도 않고 둘이 나가 국수 한 그릇 먹는 것으로 깔끔하게 한 끼를 해결하기도 한다. 집밥은 더 이상 필수 일과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오후 세, 네시면 저녁 메뉴를 고민하던 시절에서 서서히 해방되고 있다. 동네 엄마들과 커피라도 마시면 다른 얘기 실컷 하다가도 결론은 '저녁 뭐하지'였다. 서로의 저녁 메뉴를 공유하며 "우리 집도 오늘은 그걸로 해야겠다"라고 대동단결하던 일도 서서히 줄어든다. "이러다가는 밥하다 질려서 토하겠다."는 우스갯소리를 나눌 만큼 '돌밥돌밥(돌아서면 밥하고 돌아서면 밥하는)'의 시절이 있었는데... 누군가 텃밭에서 땄다며 잔뜩 준 상추는 시들어가고 세일해서 쟁여둔 고기도 소비가 안된다. 채우기가 바쁘게 줄어들던 식재료는 정체되었고 가스비는 점점 줄어든다. 그렇게 원하던, 집밥에서 해방되는 시기가 가까워져오고 있다. 방방 뛰며 좋아해야 하건만 가슴 한편 허전한 이 주책맞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밥을 해줘야만 존재감 있는 게 엄마, 아내라는 사람도 아니건만 불편한 이 마음은 무엇 때문일까? 집밥 전성시대가 끝났으니 내 인생의 전성시대가 열릴 것을 기대하고 맞이하면 되건만 여전히 집밥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밥 차려줄게 올래?"

"제사라도 해야 식구들 모여 밥이라도 먹지 않겠니?"

힘드시니 밖에서 대충 한 끼 때우자는 자식들의 성화에도, 제사는 이제 그만하시라는 요구에도 기어이 밥을 차리시는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의 마음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밥 못해서 안달 났나 싶었는데... 집밥과 함께 떠나간 이들에게 안달이 났던 거였다. 모두가 둘러앉아 밥을 먹고 그 밥을 차리기 위해 장을 보며 종종거리던, 화려했던 전성시대가 그리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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