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편>
여전히 내가 뭘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열린 마음을 갖고 유연한 사고를 갖춰야 하는 디베이트 코치다. 두 팀의 주장에 어떤 논리가 있는지를 파악해서 사안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니 아무리 당파적인 마음을 먹게 된다고 할지라도 상대의 입장을 조금이라고 헤아려보고자 이 글을 쓴다.
남편의 안면마비가 발병일로부터 두 달이 다되어 간다. 발병 후 한 달 동안 대학병원에서 처방해준 스테로이드제도 충실히 먹었고 아내의 등쌀에 못 이겨하며 한의원 침 치료도 받았다. 안면마비의 가장 큰 문제라는 눈 건강을 위해 안과도 몇 번 갔다. 조금씩 호전이 되는가 싶었는데 한 달을 넘어가니 별 차도가 안보였다.
회사일도 바쁘고 따로 준비하는 공부로 맘의 여유도 없는 남편은 서서히 지쳐갔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병이기도 하고 잘 먹고 잘 쉬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침저녁 알람을 맞춰놓고 영양제 몇 알과 혈액순환 개선제를 챙겨 먹는 것이 다였다.
조바심이 난 것은 나였다. 사람에 따라 회복되는 시간에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더 더뎌질 것은 자명한 것 아니던가. 침 치료도 꾸준히 받고 마사지 같은 것도 다녔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남편은 한사코 거부했다. 시간도 아깝고 돈도 아깝다고 했다.
결국 나는 남편 몰래 한약을 주문하는 사고를 쳤고 이것이 화를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동의 없이 한약을 주문한 것에 화가 난 남편은 노발대발 펄쩍 뛰었다. 환자 본인의 동의 없이 약을 조제한 한의원을 고발하겠다고까지 했다. 저러다 입 더 돌아가지 싶을 정도로 씩씩 거렸다. 아니, 덕분에 나까지 마비가 올 지경이었다.
내 입장에선 그렇다.
열심히 사느라 몸도 마음도 지친 남편에게 찾아온 안면마비가 안쓰럽고 딱하다. 물먹을 때 휴지를 턱에 받치고 먹는 것도, 오른쪽 눈만 깜빡거려 왼쪽 눈 통증을 호소하는 것도, 마스크로 가려 그나마 다행이지만 잘생긴 얼굴이 한쪽으로 쏠린 것도 가슴 아프다. 얼마간의 시간이 더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밥 주고 간식 챙겨주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마사지를 해준다고 하고서는 한번 해주고 까먹어 버리고, 머리 뒷근육을 풀어준다고 하고는 그것마저 고작 한번이 다였다. 애라도 되면 병원에 끌고라도 가겠다. 한의학에 대한 불신이 워낙 심하니 그것도 쉽지 않다. 양방에서 처방해준 약은 그저 아스피린 같은 혈액순환 개선제였다. 얼마나 무책임한 처방인가? 그래서 남편이 자주 가던 한의원이라 남편 몸을 잘 아니 부탁을 해서 치료약을 한재 지었던 것이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어떤 것 때문에 나았는지 모를 정도로 백방의 노력을 다 해봐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돈 20만 원 써놓고 대역죄인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일을 한 사람이 되었으며 그럴 돈 있으면 애들 학원비나 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남편의 입장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한약이나 침, 뜸을 전혀 신뢰하지 못하니 그런데 쓰는 돈은 헛돈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절실히 믿고 의지해야 약발도 드는 것 아니겠는가. 이미 안면마비로 인해 지출한 돈이 백만 원을 훌쩍 넘긴 터이니 가계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는 송구스러움도 있을 것이다. 두 아이의 학원비만도 월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데, 빠듯한 살림에 자신의 약까지 지었다는 아내가 한심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유튜브로 열심히 공부한 바로는 그런 방식으로 완치되는 병이 아니다. 수십수백 편의 영상을 시청한 결과 정답은 하나다. 양질의 영양공급과 충분한 휴식, 스트레스받지 않는 환경 조성. 그런데 아내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스트레스 지수가 확 올라온 것이다. 시키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해놓고는 되려 화를 내고 있는 아내가 이해되지 않는다. 이미 지온 약이니 먹기는 하겠지만, 이런 맘을 먹고 약을 먹은들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여전히 헛짓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저 가정의 평화를 위해 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Topic은...
< 남편의 동의 없이 한약을 제조한 아내의 행동은 잘못됐다. >
* 그런 씁쓸한 마음을 갖고 있던 차에 우연히 만난, 처음 뵙는 분이 내 속을 어찌 알고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제가 살아보니까요. 그저 오늘 눈뜨고 있으면 감사한 거예요. 아직 죽지 않고 별일 없이 살고 있다는 거잖아요. 남편이나 자식이 수개월 수년 동안 병실 신세를 져야 하는 상황도 아니고요, 한 달에 병원비로 몇 천씩 들어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애 셋 중에 한놈은 팔수하고 한놈은 오수 하면 어때요? 제 애간장이 다 녹아내려서 잘라내는 수술을 하기는 했지만 어쩌겠어요. 감사해하며 살아야죠. 남편도 장이 안 좋아 수술했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그렇게 하루하루 잘 살아있구나, 잘 버텼구나 그렇게 살면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