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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Oct 16. 2020

내가 디베이트를 놓을 수 없는 이유...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대광 000-0.

공립단설고등학교. 1981년 5월 26일 설립.

전교생 151명. 교원수 18명.

집에서부터의 거리 235km.


OO제일고등학교에 다녀오지 않겠냐는 대표님의 제안을 받고 엉겁결에 OK를 해버린 내가 제일 먼저 한일은 포털에서 학교 검색하기였다. 내비게이션까지 검색을 마친 후 바로 폭풍 같은 후회가 몰려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어려운 곳에 위치한 학교, 1, 2학년 모두 합해 88명뿐인 곳, 낯선 주제, 6시간 강의, 왕복 5시간 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고 싶지 않은'구실들이 나를 괴롭혔다. 때마침 터진, 작은 아이 학교의 확진자 발생과 1학년 전체 코로나 검사, 작은 아이의 자가격리대상 지정 가능성 등은 내가 가진 모든 갈등 상황을 한방에 정리해줄 것처럼 보였다. 불행히도(?) 아이는 검사 결과 음성이었으며 자가격리대상도 아니었다. 얄짤없이 가야 하는 상황. 대표님은 거기에 확인사살까지 하셨다.

"코로나 19의 심각성을 실감나게 설명하실 수 있겠네요."


동행하는 코치님과 6시에 출발했다. 쉼 없이 달려 8시 30분에 도착한 학교는 작고 아담했다. 담당 선생님과 교감선생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고 특히 교감선생님께서는 워낙 관심 있는 주제라 <2050 거주불능지구>를 읽어보셨다고 하셨다. 시작이 좋았다.

한 반에 22명, 한 학년 44명의 학생들은 모두 밝았고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코로나 19가 1년 내내 괴롭혔어도 온라인 수업을 들어본 적 없이 줄곧 등교 수업을 했단다. 진안이라는 곳 자체가 확진자 0명의 청정 구역이었으며 소규모 학교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곳에, 코로나 핫플레이스인 용인 수지구 OO고등학교 학부모가 강사로 갔다는 것이 송구스러웠다. 게다가 캠프 테마가 < 코로나 이후, 인류는 어디로?>라니...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행여나 며칠 후 신문에 '청정구역 진안군 코로나 확산의 주범, 용인 OO고 학부모로 밝혀져 충격'과 같은 기사가 실리면 어쩌나 걱정되기까지 했다.


< 인류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실패했다. >와 < 방역을 위해 경제활동을 제한하는 것은 정당하다.>와 같은 시의성 높은 주제에, 생생한 현장 상황을 전할 수 있는 강사가 있었다 해도 학생들의 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즉흥연설과 집체 디베이트 시간에는 열심히 참여하던 학생들도 주제 배경 설명 시간에는 맥을 못 추었다. 예닐곱 정도의 학생들만이 눈을 말똥말똥 뜨고 집중하는 상황. 자는 학생들을 깨워도 보고 큰소리도 내보고 영상도 보여주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코치로서 자괴감이 커지고 갈등도 깊어진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으니 집중하는 학생들에게만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맞는 것인지,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수업 노하우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지...


첫 번째 시간 말미에 주제에 대한 설명을 했고 일주일의 시간도 주어졌으니 입안문을 쓰는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두 번째 수업 날짜가 임박해올수록 '혹시나'하는 마음이 커졌고 결국 진안행 전날 밤, 읽기 자료를 준비했다. 주제별, 찬반 근거자료를 빼곡히 담은 여섯 장짜리 자료, 플랜 B였다. 생전 처음 입안문이라는 것을 써보는 학생들이 이거라도 베껴서 쓴다면 디베이트는 어찌어찌 가능할 것이라는 심산이었다. 함께 간 코치님의 생각은 달랐다. 적어도 몇 명은 입안문을 작성해올 것이고 그렇다면 디베이트는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하셨다. 또한 코치 임의대로 준비한 자료는 자칫 아이들의 주장을 주어진 자료 틀 안에 가둘 수 있다는 것. 맞는 말씀이셨다.


혹시나는 역시나가 되었다.

1, 2학년 도합 88명의 학생 중 입안문을 써온 이는 없었다. 뭘 어떻게 써야 할지조차 몰랐다는 것이 맞다.

준비해 간 자료를 활용해 거의 대부부의 학생들이 40분 동안 입안문 작성을 완료했고 나머지 시간 동안 모든 학생이 참여해 입안, 반박, 요약, 마지막 초점까지 진행했다. 급하게 입안문을 준비한 것 치고는 제법 훌륭한 디베이트를 보여주었다. 각 순서에 대한 이해도 잘하고 있어 쟁점을 잡아 발표하는 요약도 훌륭했고, 각 팀이 전하고자 하는 가장 큰 가치를 중심으로 전개한 마지막 초점 역시 감동이었다. 스스로 검색해 새로운 주장과 근거를 제시하는 학생도 더러 있었다. 역시 고등학생은 다르다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디베이트 실습은 무사히 마쳤지만 내게 또 다른 묵직한 화두가 던져졌다.

학생들의 재량 내에서, 그들이 소화 가능한 수준의 입안문으로 디베이트를 하도록 하는 것이 맞을 수 있다. 부족하고 빈약할지는 모른다. 입안문이 부실하면 토론 자체가 부실해질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이다. 진안 수업 역시 그대로 놔두었다면 그들의 역량대로 입안문을 준비하고 그에 맞는 디베이트를 충분히 해냈을 것이다. 안 쓰면 안 쓴 대로, 준비 안 하면 안 한 대로 하도록 지켜봐 주는 게 코치의 도리다.

아니다. 일회성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라면 제대로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맞다. 남이 찾은 자료에 맞춰 자신의 주장을 끼워 맞추는 수준에 머물 수는 있다. 하지만 제공된 자료 안에서 주장에 맞는 근거를 찾아 쓰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된다. 게다가 그럴듯한 근거를 갖춘 입안은 디베이트의 수준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다. 잘 쓴 입안문으로 그럴듯한 디베이트를 하다 보면 학생들의 지적인 만족감까지 채워줄 수 있다. 최소한의 시간 동안 디베이트에 대해 최대한의 것을 전해주고 오는 것이 코치의 도리다.

답을 내기가 어렵다...


여기서 우리의 고민이 끝난게 아니다. 아직 한 주간의 실습 일정이 더 남아있다. 마지막에는 두 반이 찬반을 나눠 디베이트 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또다시 코치님과 나는 머리를 맞대며 고민 중이다. 이미 한번 실습을 했던 주제와 입장으로 다시 한번 하게 할 것인지, 새로운 주제, 새로운 입장으로 진행할 것인지.


유난히 처음부터 지금까지 매 순간순간 고민과 갈등이 깊던 OO제일고의 디베이트 캠프.

내가 왜 디베이트를 손에서 놓을 수 없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던 경험이었다.

나는 디베이트 코치가 '디베이트라는 수업 tool을 가르치러 가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매 순간의 선택과 그 선택이 모인 삶을 더욱 풍요롭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도구가 바로 디베이트라는 것을 알려주는 직업'이다.

 

눈앞에 펼쳐진 갈등 상황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하고 그 끝에 무엇이든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한 결과에 후회가 없으려면 고민의 과정이 논리적이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나 역시 바이러스 창궐 지역에서 청정구역으로 강의를 가는 것이 옳은가의 여부, 가지 말아야 할 이유과 가야 할 이유 사이의 갈등, 학급의 모든 학생을 끌고 가야 하는가의 여부, 정리된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옳은가의 여부 등 끊임없이 나 홀로 디베이트를 이어갔다. 매 순간 갈등과 선택의 연속이었으며 디베이트는 그 상황을 종료시키는데 유효한 전략이었다.


삶 자체가 디베이트이며 그것이 내가 디베이트를 놓지 못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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