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받는 직장인이 아닌 나는, 그저 어디서 일을 준다고 하면 감사히 달려간다. 생각보다 후한 대접에 황송할 때도 있지만 들인 공에 비해 낮은 강사비를 받거나 교통 실비만을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그마저도 코로나로 끊긴 마당에는 그저 백수다.
일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의 마음이란, 감사함으로 넘친다.
'나의 무엇을 보고 내게 일을 맡겼을까, 미천한 나를 저리 인정해주니 최선을 다해야겠다, 놀면 누가 교통실비라도 주나.'라는 마음으로 작은 일이건 큰일이건 기쁜 마음으로 마주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계산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달라진다. 똬리를 틀고 있던 마음이 고개를 들며 간사한 혀를 놀리기 시작한다.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더니 이제는 당연해 진건가? 이렇게 일할 기회라도 주는걸 고마워하라는 건가? 언제까지 경험, 경력만 쌓으라는 건가?'라는 불평불만이 쌓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는 '그래, 내가 뭐 그리 대단한 능력자겠어. 그 정도밖에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 정도 수준의 사람이라는 얘기겠지. 능력 이상의 처우를 바라면 안 되는 거지.'라며 냉소적이고 삐딱한 마음을 장착한다.
그 과정을 모두 거치고 나서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일체유심조'이다.
내 마음이 지어낸 온갖 시나리오에 휘둘리다 보면 기쁨과 절망 사이를 미친 듯이 오가게 된다. 특히 부정적인 망상의 영향은 더 크고 위험하다. 그걸 깨닫는 순간 상황과 남에 대한 비난은 거두게 된다. 늘 나만 참고 희생한다는 피해의식도 접게 된다. 모든 것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하게 되면 편안함을 얻는다. 다, 마음먹기 나름이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몇 번이고 나의 마음을 흔든 주인공은 원주의 어느 시장에서 칼국수집을 운영하시는 사장님이다.
불이 난 시장통 한쪽에 세운 가건물에서 다시 장사를 시작하시던 장면에 안타까웠고 장사가 잘될만하니 할머니의 암투병 소식이 전해지며 속상했다. 불행은 왜 그리 한 사람에게만 몰아서 닥치는 것인지 원망스럽기도 했다. 최근에 프로그램에서 다시 찾은 할머님은, 그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온화하고 해맑은 모습이셨다. 출연진뿐 아니라 스텝들의 먹거리까지 푸짐하게 챙기시고 더 주지 못해 안달이셨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온 자신을 염려하며 전국 각지에서 보내주는 응원 편지와 모자에 감사해하고 행복해하셨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서, 아무리 인상이 좋아 보이고 상황이 딱해도 생판 남이다. TV 프로그램을 통해 접한 할머니에게 마음을 열고 온갖 정성을 전하려 한 사람들의 마음은 무엇일까? 칼국수 맛이 칼국수 맛일 텐데 시간을 들여 그곳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을 할머니의 말씀에서 찾았다.
가게를 찾은 손님 중 "사장님의 손을 한 번만 잡아봐도 될까요? 사장님의 손을 잡으면 행복이 전해질 것 같아요."라던 분이 계셨단다. 할머니는 순순히 손을 내어주시며 말씀하셨단다.
"얼마든지 만져요. 내 복 다 가져가세요~"
이미 과분한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 더 바라는 게 없다고 하시는 그분의 말씀은 성공을 업고 나오는 여유가 아니었다. 그분의 삶이 원래 그러했으리라. 숱한 시련이 닥쳤더라도, 과분한 영광이 왔더라도 그저 겸허히 받아들였으리라. 그것이 나의 모자람이나 상대의 모짐 때문이 아니라 그저 벌어질 일이기에 벌어진 것이라고 편하게 마주했으리라. 내가 가진 복을 다 내준다 해도 행복한 마음까지 빼앗길 일은 없음을 아는 경지.
사람들이 할머니의 손을 잡아 전달받고 싶었던 것은 할머니가 가진 복이 아니라 그 마음가짐이었던 것 아니겠는가.
다시 나의 삶으로 돌아와서,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을 때 그저 감사해하는 그 마음에만 머물러야겠다. 내 손을 잡는 이의 손이 빈손인지, 어떤 음흉한 저의가 있는 것은 아닌지를 따지지 말고, 내게서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가도 난 행복하다는 할머니의 마음을 잊지 말고자 한다.
이렇게 평온한 마음을 가졌으니, 이제 누구든 날 이용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