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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an 23. 2021

스팸 대체불가론

백두 번째 시시콜콜

갓 지은 하~~~ 얀 쌀밥을 숟가락 가득 뜬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위에는 기름에 지져 따끈한 햄을 얹는다.

최대한 입을 크게 벌려 밥과 햄을 받아들이고 우물우물 씹는다.

담백한 쌀밥과 짭짤한 햄의 조화는, 언제나 옳다.


여기서 잠깐!

숟가락 한가득 뜬 밥은 하얀 쌀밥이 어울릴까, 아니면 현미나 보리가 섞인 잡곡밥이어도 상관없을까?

프라이팬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던 햄은 스팸이어야 할까, 아니면 런천미트나 리챔 등 캔에 담긴 햄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을까?


이 고민의 시작은 22일 자 YTN 기사에서 비롯됐다.

< '스팸 덮밥' 둘러싼 리뷰 전쟁으로 '스팸 인증제'도입 검토 >라는 제목을 보며 오늘이 4월 1일 만우절인가 고민했다.

사연인즉슨 이랬다.

배달앱을 통해 음식을 주문한 한 고객이 자신이 시킨 것은 스팸 덮밥인데 런천미트가 올려진 밥이 배달 왔다며 해명을 요구하는 리뷰를 올렸다. 이에 해당 음식점 주인은 이렇게 황당한 댓글은 처음이라며 스팸이라는 것은 브랜드명이 아니라 통조림 햄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거짓 장사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스팸은 스팸이지 런천미트와는 다르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대일밴드, 포클레인처럼 공통으로 통용되는 명사라며 음식점 사장을 옹호하는 의견도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 CJ 제일제당은 브랜드를 지킨다며 '스팸 인증제' 추진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기사에서는 친절하게 스팸과 다른 통조림 햄의 차이점을 설명해주기도 했다.

"스팸의 돼지고기 함량은 93~94%이며 여기에 소금이나 물이 들어간다. 반면 런천미트는 돼지고기 40.03%와 닭고기 30.02%로 이루어져 있어 햄 마니아들은 두 제품의 맛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또한 동원 '리챔'은 돼지고기 함유량이 약 91%이며 사조 '안심팜'은 약 80%이다."


별 시답잖은 논란이라고 치부해버릴 수가 없다. 난 스팸 충성고객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큰 외숙모가 하시는 양품점에 가는 것은 나에게 어떤 쇼핑보다도 설레는 일이었다. 수원 남문 시장에 손바닥만 한 가게였지만 없는 게 없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슬리퍼부터 홈웨어, 주방 식기와 조리도구, 은은한 향이 나는 화장품, 초콜릿, 과자 등... 입구에서부터 진하게 나던 '부자 냄새', '미국 냄새'가 아직도 정확히 기억난다.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에게 큰 외숙모는 뭐라도 한 가지 챙겨주셨고 그중에는 스팸 캔이 있었다. 지금처럼 원터치로 간단히 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상단에 붙어있는 열쇠 모양의 고리에 옆에 튀어나온 얇은 철판을 끼워 넣는다. 조심스럽게 한 바퀴를 돌돌 말아가며 돌리면 얇은 철판이 잘라지며 뚜껑과 본체가 분리되는 방식이었다. 천하장사 소시지의 껍질을 까듯이 섬세한 작업이었다. 중간에 철판이 잘라지면 대략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사리 꺼낸 스팸은 날로 먹어도 맛있고 부쳐먹어도 맛있었다. 그 맛은 엄마에게도 강렬했는지 외숙모가 양품점을 접으신 후에도 엄마는 스팸을 사 오셨다. 지글지글 구워지며 온 집안을 가득 채우던 스팸 냄새,  치즈 박힌 스팸이 처음 나왔을 때의 경이로움 모두를 잊지 못한다.


내 아이들의 첫 통조림 햄도 스팸이었다. 근본 없는 사대주의라고 생각돼서, 국산 돼지고기로 만든 햄 먹이고 싶어서 수많은 대체제를 먹어봤지만 맘에 드는 것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어느새 스팸 맛에 길들여진 큰아들은 다른 통조림 햄들을 거부했다.

"스팸을 구워달라고 할 때는 스팸을! 스팸을 먹을 때는 흰쌀밥을!"

흡사 가훈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켜져야 하는 불문율...


사정이 이러하니 스팸 덮밥을 먹고자 시켰을 때 스팸이 아닌 다른 햄이 얹어져 있다면 나라도 실망했을 것이다.

야쿠르트, 버버리, 호빵, 가그린, 호치키스, 대일밴드, 레고, 진미채, 유한락스, 엘리베이터, 봉고차, 페브리즈, 크리넥스, 락앤락, 햇반... 찾아보니 당연히 사용하고 있던 브랜드들이 많다. 선구자 역할을 한 특정 브랜드가 유명해지면서 같은 상품군을 대표하는 일반명사화가 된 것들.


그래서 오늘의 디베이트 Topic은...

< 스팸 인증제 도입은 바람직하다. >

< 스팸은 통조림 캔을 통칭하는 일반명사다. >


* 큰아들은 햄류의 가공식품을 좋아한다. 분홍 소시지, 비엔나소시지, 프랑크 소시지 등을 해달라고 할 때는 브랜드를 따지지 않는다. 아예 브랜드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스팸에 대해서는 진심인 편... 식감과 염도가 다른 걸 대번에 눈치챈다. 다른 건 몰라도, 그에게 있어 스팸은 고유명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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