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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r 07. 2021

우리 아빠가 누군줄 알고...

KTX에서 방역수칙을 어긴 채 햄버거를 먹으며 소란을 일으킨 이가 있단다.  제지하는 승객들에게 우리 아빠가 누군 줄 아느냐며 막말을 했고 급기야 '아빠'에게 전화를 걸 상황을 이르기까지 했단다. 결국 모욕 혐의로 입건되었고 철도안전법과 감염병 예방법 위반 혐의로도 고발된 상태.


잘 알지도 못하는 그녀를 비난하고픈 생각은 없다. 당사자에게 사과를 했다고 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그녀의 사연이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래서 대체 아빠가 누구냐?"는 엉뚱한 의문이 넘쳐나는 댓글을 보다 보니 우리 아빠가 떠올랐다.

우리 아빠는 누구지? 어떤 사람이지? 만일 저 상황에서 전화기 너머 아빠는 내게 뭐라고 했을까?


우리 아빠는, 아니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해오신 터라 아빠 대신 '아버지'라 부르라 하셨다. 입에 잘 붙지도 않던 그 호칭 때문인지 워낙 엄했던 탓인지 아버지는 늘 대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착한 동생과는 달리 난 유난히 아버지께 많이 혼났다. 사실, 혼난 이유는 딱 하나였다. 거짓말했을 때.

학교 숙제를 안 해놓고 했다고 했을 때, 피아노 학원 땡땡이쳤을 때, 고등학교 때 몰래 술 먹다 안 먹은 척했을 때.

체벌을 자주 하시진 않았지만 벽에 걸렸던 달력을 돌돌 말아 허벅지 바깥쪽을 몇 대 때리셨다. 눈물 쏙 빼는 딸과 중간에서 몸으로 막고 나서는 엄마 때문에 그쯤에서 멈추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한마디 하셨다.

"먼저, 인간이 돼라!"


엄한 모습만 있었던 건 아니다. 아버지 표현을 빌리자면 '남자는 속정'이라며 드러나지 않게 잘해주셨다.

수년간 이라크 건설현장에 파견 나갔다가 돌아오신 아버지는 건설업을 시작하셨고 밤낮없이 바쁘셨다. 그 와중에도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하셨다. 일요일 아침에 차려주신 당근 잔뜩 들어간 계란찜, 송도행 협객 열차를 타고 갔던 겨울여행, 그날 밤 작은 난로에 네 식구가 옹기종이 앉아 발을 녹이던 장면. 기억력 나쁜 내게 아직도 남아있는 추억이다.


설이 되면 붓펜으로 정성스레 쓴 연하장을 주셨고 생일에도 잊지 않고 편지를 써주셨다. 지금도 내 생일, 남편 생일, 딸의 결혼기념일 아침이면 잊지 않고 잘살라는 덕담을 보내오신다.

용돈은 늘 빳빳한 새 돈으로 주셨다. 안방 장롱 아버지 서랍에는 늘 천 원짜리와 오천 원짜리 신권 몇 묶음이 있었는데 그건 우리를 위한 용돈 전용 신권이었다.

돈을 좇지 말고 돈이 자신을 쫓아오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에 여전히 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신다.

사업이 잘 돼서 잘 나가는 사장님이셨을 때도, IMF에 부도를 맞아 빈털터리가 됐을 때도 흔들림 없어 보이셨다. 안 좋은 상황에서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격하게 기쁜 소식 앞에서 호들갑 떠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아내와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자식들 앞에서 엄마를 흉보거나 업신여긴 적이 없다.

발뼈가 으스러지는 사고를 당해 두 달간 입원했어도 신음 한번 입 밖으로 낸 적이 없다. 남 신경 쓰게 하는 걸 끔찍이 싫어해 두 달 동안 모두와 연락을 끊고 입원 사실을 숨겼다.

얼마 전 건강검진에서 나온 선종을 제거한다며 입원을 하셔서는 "나 내일 수술한다!"는 문자를 한통 보내신 게 다였고, 조직검사 결과도 혼자 보러 가시겠다더니 "암이란다."는 짧은 말만 던지시던 아버지다.

뭐가 제일 드시고 싶냐는 딸의 물음에, "소주!"라며 껄껄껄 웃으시는...

우리 아버지는 이런 분이시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는...

작은 거짓말도 잘 못한다.

돈 버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다.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싫어한다.


따라서 만일 내가 기사에서 본 여성과 같은 행동을 했다면, 아버지는 당장 벽에 붙은 달력을 돌돌 말고 달려와 허벅지를 때리시며 호통을 치셨을 것이다.

"인간이 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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