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May 17. 2021

까다로움에 대하여

다한증인 남편의 여름옷은 무조건 검은색과 흰색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다른 색 옷은 겨드랑이와 등판의 땀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때문이죠.

남편은, 발등을 많이 덮는 덧신과 통이 넓고 길이가 긴 바지를 싫어합니다.

입에 맞는 반찬이 없으면 참치캔을 땁니다.

중년 남성들이 많이 입는 브랜드의 옷은 아저씨 같다며 싫어하고 택시 냄새가 나는 차량용 방향제에 질색합니다.

꽃향기가 나고 피부를 촉촉하게 해주는 바디샴푸 대신 씻고 나면 뽀드득거리는 노란색 비누를 사달라고 보채기도 합니다.

이러저러한 그의 기호에 대해 전 까다로운 남자라며 응수했지요.


며칠 전 큰맘 먹고 백화점에서 스니커즈를 사주었습니다. 정장구두와 운동화 사이, 출퇴근용으로 적합해 보여 몇 년째 줄곧 사주던 브랜드였지요. 별말 없기에 맘에 드나 보다 했는데, 실은 그런 스타일, 그 브랜드가 맘에 들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군말 없이 몇 년간 신던 남편의 폭탄발언에 저는 살짝 당황했고 결국 반품을 했습니다.

실은, 그렇게 반품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옷장을 열고 한참을 들여다보며 입을 옷이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정작 쇼핑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남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대신해 옷이며 신발을 주문했지만 열에 여덟, 아홉은 반품행이었습니다.

그의 반복되는 거절이 제겐 까다로움으로 느껴졌던 것이죠.



남편의 동네 친구이자 우리의 대학 동문인 A 오빠와 치맥을 했습니다. 대화 소재는 남편의 까다로움이었죠.

남편 : OO아, 내가 그렇게 까다롭냐?

친구 : 네가? 우리 중에 제일 무난하지. 특별히 싫다고 하는 것도 없고 아무거나 잘 먹고.

나 :  그래요? 내가 보기엔 우리 남편 엄청 따지는 거 많은 것 같은데?

친구 : 아닌데? 네 남편 안 까다로워~

나 : 외식을 해도 무조건 고기만 먹잖아요. 회를 싫어해서 먹으러 가더라도 잘 안 먹고 있지.

남편 : 여보, 장모님이 회 좋아하셔서 식구들 모임에 매번 회를 주문하셔도 나 군소리 없이 다 먹잖아.

친구 : 와~ 안 까다롭네~ 난 장모님이 수육 해주셨는데 먹다가 나 먹고 싶은 거 따로 시켜먹었어. 난 물에 빠진 고기는 안 먹거든..

나 : 헐... 진짜요? 그래도 그렇지 장모님이 손수 해주셨는데?

친구 : 미리 말씀드렸었거든... 수육 싫어한다고. 그래도 예의상 세 점은 먹었어.

남편 : 거봐~ 나 안 까다롭다니까?

나 : 회는? 회는 다 잘 먹어요?

친구 : 흰 살 생선회만 먹어. 송어, 방어, 전어 이런 건 안 먹어. 흙냄새 나는 것 같아서. 생선구이도 비린내 나서 안 먹어. 치킨 껍질은 좋아하지만 백숙 껍질은 다 벗겨서 버려. 비빔밥 위에 얹어진 상추, 떡국이나 칼국수 위에 뿌려진 김가루도 다 걷어버려. 생굴은 먹지만 다른 해산물은 안 먹고. 짬뽕에 들어있는 양배추도 다 건져서 옆에다 따로 놔.

나 : 헐..... 물에 빠진 고기 안 먹는다며 백숙은 또 먹어요?

친구 : 가끔 먹어. 하하

나 : 까다로움에 일관성이 없는데?

남편 : 거 봐 거 봐. 난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다 먹잖아.

친구 : 옷장에 걸려있는 옷이 흐트러지는 거 싫어하고 물건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거 엄청 싫어해.

나 : OO이 오빠는? 그 오빠는 안 까다로워요?

남편 : OO이? 걔는 까다로운데 삐지기까지 해~

친구 : 맞아~ 유정아! 네 남편 정도면 엄청 무난한 거라니까? 가만히 들어보니 송 작가가 까다로운 거네~

나 : 그런 건가? 내가 까다로운가?


결국, 남편은 그저 약간의 호불호가 있는 것일 뿐 까다롭지는 않은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싫더라도 아내의 눈치를 보며 묵묵히 받아들이는 경우가 더 많고, 맛없더라도 그냥 먹는 경우가 더 많으며 대세에 지장 없다면 그냥 따르는 사람으로요...

여태 남편이 까다롭다고 느꼈던 것은 저의 까다로움이 남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였던 것으로...


어쩌면 남편은 까다로운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숨죽이며 살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큰맘 먹고 "싫어!"라도 말했는데 흥분한 아내는 남편의 친구를 붙잡고 우리 남편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들어보라며 하소연을 하고 있었던 것이구요.


그에게 전 까다로운 사람입니다.

저에게 그는 다로운 사람입니다.

고로 우리는, 사람은 모두에게 까다로운 존재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의란 무엇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