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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May 25. 2022

비루한 몸뚱이엔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토분

5월 4주 보글보글 글놀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아"

"이번 분갈이 철에는 대대적인 이동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에요."

"뭐? 어디서 들었어?"

"거실에 있는 레인보우 마지나타한테 들었어요. 아줌마가 마지나타를 보면서 그랬대요. '에휴, 올봄에는 꼭 더 큰 화분으로 옮겨 심어 줄게~'라고요. 마지나타가 이 집에 온 지도 벌써 2년이 됐잖아요. 지금까지 내내 같은 화분에 살았으니 좁을 만도 하지요. 걔도 그 새 자랐잖아요."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주인아줌마가 바쁘다며 분갈이 안 했잖아. 훌쩍 자란 애들 넓은 화분으로 옮겨줄 때가 되긴 됐지. 올해는 하긴 하겠구먼. 한해를 못 버티고 죽어버린 매화 분재도 좀 치워버렸으면 좋겠어. 뭐야 저게? 기분 나쁘게. 게다가, 자기한테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화분을 가진 애도 있고 말이야."

길쭉하고 쭉 뻗은 몸매를 뽐내는 드라코가 아래쪽에 자리 잡은 홍페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눈으로는 옆에 서 있는 선인장을 연신 째려보았다.

"아휴... 듣겠어요. 목소리 좀 줄이셔요."

홍페페는 힐끔힐끔 선인장 눈치를 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뭐 어때. 자기도 알겠지. 이 베란다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화분을 꽤 차고 있는데 전혀 반려식물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있는 걸 말이야."


선인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드라코의 구박이 또 시작된 것이다.

2년 전, 이 베란다에 처음 이주했을 때만 해도 선인장은 꿈꾸듯 행복했다. 적어도 버려지지는 않겠다는 희망도 있었다. 전에 살던 집의 아줌마가 서울의 새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 버려두고 간 식물 몇개를 지금 집의 아줌마가 거두었다. 선인장을 비롯해 염좌, 파키라, 아라우카리아를 데리고 왔는데 오자마자 새 화분으로 모두 옮겨 심어주었다. 하지만 파키라는 반년을 못 넘겼다. 올 때부터 잎이 몇 개 안 남았던 아이였다. 염좌는 무서운 생명력으로 잘 자라 일부는 분양까지 보냈다. 아라우카리아는 덩치답게 튼튼하게 지내던 것이 올 초부터 골골댔다. '이번 분갈이 철에는 아라우카리아도 다시 손 좀 봐주셨으면 좋겠네.' 하고 선인장은 기도했다.


사실, 선인장은 다른 친구들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코는 없지만 내 코가 석자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게 맞을 거야. 선인장이니 '내 가시가 석자'라고 해야 하나? ㅎㅎㅎ'

선인장은 이 와중에도 농담이 나오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베란다의 구박댕이 주제에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원래 있던 화분들의 시샘과 질투, 왕따가 시작된 것은 이사를 온 선인장이 분갈이를 마친 직후였다.

"내 참 기가 막혀서. 어디서 어떻게 살다 왔는지도 모르는 애한테, 윗동도 잘려서 더 자라지도 않을 애한테 토분이 가당키나 해? 그것도 새 토분을? 비루한 몸뚱이를 하고 어찌 그런 비싼 화분을 차지했지? 이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잖아!"

"보통은 저렇게 되면 버리지 않나? 쟤랑 같은 화분에 있던 애들 둘은 버렸잖아. 왜 쟤만 남겨놓은 거야?"

"아니, 도대체 왜 저 선인장한테 화분이며 흙을 투자해? 이 집 아줌마 진짜 이해가 안 간다. 앞으로 앞날이 창창한 애들한테 투자를 해야지. 저 몬스테라 좀 봐. 얼마나 잘 자라니? 벌써 몇 명한테 분양했는지 셀 수도 없어. 저런 애한테 좋은 집을 주고 흙을 투자해야지. 나 원 참."


선인장은 자기가 잘못한 것은 하나 없는데 매일 이 같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게 힘들었다. 이럴 때는 자신이 물 없이 여러 달도 버틸 수 있는 선인장이라는 게 싫었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구차한 삶.

'그래. 난 비루한 몸뚱이가 맞아. 윗둥이 잘려 자라지도 않고 이 상태로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잖아.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천벌을 받고 있는 거지?'

선인장은 매일 지옥 같은 날을 보냈다. 벌써 2년째다. 차라리 자신을 버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한밤중에 깊은 산속에다 버려두고 갔으면 좋겠다고.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든 말라죽든 알아서 할 테니 이제 좀 놔줬으면 좋겠다고.


베란다 화분들만 선인장을 멸시하고 혐오하는 게 아니었다. 주인아줌마의 친한 친구 중 원예에 조예가 깊다는 순자 아줌마는 정곡을 찔렀다.

"이번 분갈이할 때, 쟤 버려~ 화분이 아깝다. 저기다 멋진 거 하나 새로 사서 심어~ 이사 간 그 언니도 흉물스러우니까 다 버리고 간 거야. 새집으로 이사 가면서 몽땅 새것으로 들여놓으려고. 난 그거 되게 기분 나쁘더라? 어떻게 키우던 애들을 다 버리고 가? 자기는 그걸 뭘 또 그렇게 다 받아왔어?"

"자기도 불쌍해했잖아. 살아있는 애들인데 두어달째 빈집 베란다에 방치되어 있던 걸 나랑 같이 낑낑대고 옮기고 분갈이도 자기가 다 해준 거, 잊었어?"

"기억나지. 그래도, 이제 다 버려. 안 예뻐."


순자 아줌마의 냉정한 말에 주인아줌마는 아무 말 않고 선인장을 한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선인장을 보면 윗둥이 잘려나간 그날에 갇혀 살고 있는 것 같아. 어쩌면 버려졌던 그날의 기억에 갇혔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못 버리겠어. 다시 또 버릴 수는 없어. 꼭, 우리 같지 않니?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저 선인장처럼 더 이상 무엇을 꿈꾸기에는 늦어버린 것 같은 지금의 나 같아. 죽은 건 아닌데 살아있는 것 같지도 않을 때가 있잖아. 그냥 매일 아침 눈뜨고 먹으니까 살아있는 건 알겠는데 젊었을 때처럼 부푼 꿈도 없고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의심도 커져서 시도도 못하잖아. 그래서... 큰맘 먹고 산 토분을 저 볼품없는 선인장에게 준거야. 나 같아서."


베란다에 있던 드라코와 홍페페, 염좌, 아라우카리아, 몬스테라, 사랑초, 안시리움, 마오리 소포라, 극락조, 스투키, 콤펙타, 겐차 야자, 만세 선인장, 까라솔, 천국의 계단, 아이비, 마지나타... 모두 숙연해졌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고개를 떨구었다. 생의 절정을 지난 듯 보이는 이도 있고 하루하루 자라는 게 신나는 이도 있었으며 끝이 얼마 안 남은 듯 보이는 이도 있었다. 모습은 제각각이었고 자라는 속도나 풍성함은 달랐지만 다들 완벽하지 않았다. 조금씩 상처가 있었다. 잎이 찢겼거나 누렇게 뜨고 서서히 말라가고, 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서로 제 잘났다고 뽐내도 결국, 고만고만한 삶이었다. 손바닥만 한 화분에 갇혀 옴짝 달짝 못하고 있기는 매한가지 아니던가. 토분이면 어떻고 플라스틱 화분이면 어떠한가. 그러니, 아줌마가 아끼는 토분이 선인장 몫이 되었다 해도 그게 그리 배 아플 일은 아닌 것이다. 그게 선인장을 혐오하고 따돌릴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거였다.

여전히 꼿꼿한 드라코가 말했다.

"그래...안 맞으면 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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