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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l 06. 2022

식상해서 아름다운, 첫 경험

6월 4주 보글보글 글놀이
"첫 경험"

남편과 처음 사랑을 나눈 이야기.

식상하다.

그가 나의 첫사랑이자 첫 남자이며 여전히 그 뜨거움을 증명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생명을 내 몸에 처음으로 품고 세상을 만나게 한 이야기.

뻔하다.

나를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렀으며 엄마로 누릴 수 있는 모든 처음을 선물해주고 있을지라도.


학생들을 만나 처음으로 디베이트를 가르쳤던 이야기.

재미없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떨리지만 용기 내어 한마디를 내뱉는 그 마음에 감동스럽지만.


면허를 따고 처음 차를 몰고 나갔던 이야기.

지루하다.

시동 몇 번 꺼트린 거랑, 폭우 쏟아지던 밤 술에 취한 동생을 데리러 가느라 중앙선 넘어 운전했던 게 다니까.


처음으로 해외여행 갔던 이야기.

평범하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92년, 인생에 남는 것은 여행밖에 없다는 아버지를 따라 네 식구가 갔던 미국이 경이로웠을지라도.


초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했던 짝사랑, 처음으로 키웠던 애완동물 다람쥐, 아버지가 처음으로 직접 지었던 우리 집, 남편이 처음 선물해준 목걸이, 큰아이가 처음 썼던 동시, 작은 아이가 처음 받아온 성적표.

아버지 사업이 처음으로 망해 반지하로 이사 갔던 날, 고등학교 때 방송실에서 처음으로 소주를 마셨던 날, 멜론이라는 과일을 처음 먹었던 날, 집에 들인 식물을 처음으로 죽였던 날, 동네 지인들과 처음으로 화투를 쳤던 날.


'첫'이라는 관형사를 떠올리자 그 별것 없는 일들이 동시에 나를 덮쳐왔다. 겪었던 모든 첫 경험이 기억 속에 이렇듯 또렷하게 박제되어있을 줄이야. 그 식상하고 뻔하고 지루하고 재미없고 평범한 하루하루가 바로 방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다니. 그렇게 의미 있는 '처음'이 많았다니...


기억을 더듬다 끊기면 집안 곳곳에 남아있는 기록을 뒤적였다.

아이들이 처음 써준 어버이날 카드, 아이들의 첫 일기장, 남편에게 보낸 첫 편지, 그에게서 받은 첫 편지, 모든 처음이 담겨있는 사진첩, 모든 처음이 기록되어있는 내 일기장.

일기장의 가장 첫날은 1984년 11월 13일이었다.

1984년 11월 13일 화요일 맑음
오늘의 중요한 일 - 학교 갔다 학원 가기
오늘의 착한 일 - 없는 것 같다.
일어난 시각 - 오전 7시 35분

내 짝은 나쁘다. 매일 나를 꼭꼭 찔러 가면서 나를 괴롭힌다. 그래서 내짝은 우리 분단에서 제일 많이 떠드는 수다장이다. 나는 내짝이 싫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내가 그 아이에 짝을 하라고 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도 내짝은 시골아이라 드러웠는데, 요새는 좀 나아진 것 같다. 나는 드러운 걸 싫어한다. 하지만 다시 잘 사귀어 보겠다.

잠자는 시각 - 오후 9시 30분
오늘의 반성 - 없는 것 같다.
내일의 할 일 - 목욕하기.

'참 잘했어요' 도장 하나 받기 위해 억지로 써야 했던 일기였겠지만 어제와는 새로운 이야기를 건져 올리려고 초등학교 2학년의 나는 얼마나 고심했을까. 매일 똑같은 가방을 메고 매일 똑같은 반찬을 먹으며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낸다고, 일기장에 쓸만한 특별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고 투덜거렸겠지만 그날의 나는 나를 괴롭히는 지저분한 짝을 떠올렸고 처음으로 그 아이와의 관계 개선을 다짐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처음 경험해보는 매일을 기록했다. 일기장, 다이어리, 스케줄러를 전전하며 기록을 이어왔다. 지루한 일상 속에서도 처음 마주하는 나의 감정을 발견했고 내 생애 처음 겪어보는 일들에 대해 환호성을 지르며 반겼다. 그 마음에 중독된 나는 이제 브런치에서 모든 처음을 기록 중이다. 그러다 보니 막상 '첫 경험'이라는 주제가 주어졌을 때 매 순간이 첫 경험이라 특별할 것 없다는 첫 경험의 매너리즘에 빠진 나를 발견한 것.


식상한 첫사랑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

뻔한 육아기, 평범한 여행기는 더더욱 없다.

단, '첫 경험'이라고 퉁쳐서 하나만 대표주자로 내보내기엔 매일의 모든 순간이 새로웠고 신기했으며 소중했다.


행복하려면 매 순간에 감탄하고 모든 첫 경험에 감사해야겠다.

더 행복하려면 매일 마주하는 모든 '첫'을 기억하며 살아야겠다.

더더 행복하려면, 그 기억에 마음을 얹어 글로 남겨야겠다. 식상한 매일이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매거진의 이전 글, 김장훈 작가님의 < 첫 경험. 그 긴장과 슬픔과 그리고 두려움 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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