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친구들과 동해안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각자 떨어져 생활하다가 대부분 몇 년 만에 보는 얼굴들이다. 머리가 좋았던 친구는 이곳에 같이 왔던 게 40년쯤 되었을 거라고 기억을 해냈다.
40년 세월이 훌쩍 지났으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랬을 거다. 강산이 4번이나 변한 시간이었으니. 친구 하나는 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쳤고, 다른 친구는 손이 온전하지 않아 평범하지 않은 몸이 되었다. 다른 친구 둘은 두 번씩 여인과 이별했으며 나머지 둘은 홀로 된 그들을 살짝 부러워했다.
예전 여행에서는 경제적으로 궁핍을 느꼈는데 이번에는 궁핍이 열정에 있었다. 바닷가 해변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풍년 만난 오징어 배처럼 많았지만 우리는 술만 마셨다.
남자들은 늘 쓸데없는 생각으로 귀중한 시간을 보내곤 한다.
1935년에 발표된 주요섭의 단편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시대적 배경은 우리나라에서 봉건주의 잔재가 여전한 가운데 사회적으로 초기 자본주의의 조짐이 안개처럼 서서히 밀려들어오던 무렵이다.
소설은 사랑방에 하숙 들어온 손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고민하는 24살 먹은 젊은 여인이었던 과부 엄마가 당시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사회적 규범으로 인해 결국 눈물 나는 자기희생을 선택하게 되는 내용을 6살 먹은 딸 옥희의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잔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주요섭의 소설 내용은 그보다 110년 앞선 1825년에 러시아에서 귀족 출신의 젊은 장교들이 봉건 제국을 무너뜨리고 서구화된 자유주의 국가를 수립하려다 실패하고 반역죄로 대부분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나게 된 《데카브리스트(Dekabrist) 혁명》의 이면 스토리와 비교된다.
당시 황제는 은전을 베풀어 결혼한 장교 부인들에게 “신분, 재산, 명예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남편을 따르든지, 아니면 남편과 헤어지고 귀족으로 기존의 권리를 누리면서 행복한 일생을 보내든지 하라”는 선택권을 부여한다.
이때 대다수 현명한 여인들은 남편과 쿨하게 이별하고 행복한 미래를 선택한다. (자세한 내용은 예전 글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의 단상》에서 언급하였다).
한 세기의 시차를 넘어 옥희 엄마와 제정 러시아 귀족 여인들의 대비되는 삶을 보며 오늘을 반추하게 된다. 요즘 여성들은 이전과 확실히 다르다. 민주화와 선진화도 순식간에 이룩한 나라이니 여인들의 변천사라고 다를 리는 없겠다.
이런 추세면 머지않아 남녀평등에서 사회 곳곳에서 연약한 남성들이 공유공간을 주장해야 하는 여성 상위시대가 도래할지 모르는 일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부터 여인의 선택에 의해 남자들의 운명이 갈리곤 했다. 긴 역사를 더듬어보지 않아도 많은 사례가 떠오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앞서 얘기한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30년대 중반 무렵에도 그랬던 것 같다.
옥희 엄마가 사랑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순간 두 남자의 운명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사랑방 손님은 요즘에 그토록 핫한 이슈인 거처를 포기하고 떠나야 했으며, 계란 장수도 하루아침에 단골손님으로부터 내쳐져 계란을 파는 일감마저 놓치게 됐으니 말이다.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남자의 운명은 그런 것인가 보다.
만일 옥희 엄마가 사랑을 선택했으면 그녀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40년 만에 같이 바다를 찾은 친구들이 짙어져 가는 노랗고 붉은 단풍이 익어가는 산야의 풍광을 배경으로 깊은 물속 내음이 물씬 풍기는 속초 바닷가에서 이런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스스로 위로하고 돌아왔다.
앞으로 ‘40년 후에 우리가 어찌 되어 있을까’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그곳에 남겨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