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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이야기 Jan 11. 2024

단어에 갇힌 정체성

<수치>를 읽고

수치 :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

Disgrace : the condition of feeling ashamed or of losing or becoming unworthy of respect or


 책의 내용이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내용을 정리하기보다 가장 인상적인 내용 2가지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에 방향이나 해결방법은 없지만 적어보려고 한다.


취약성

 

 인간은 취약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한마디로 사람들과의 협력과 관계가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모이게 되면 당연히 정치가 생기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취약성을 결정짓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물리적인 취약성만 있지 않고 다양하게 취약함을 정의 내릴 수 있기 때문에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하느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누구든지 취약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취약하기 때문에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였다. 무장 분쟁 속에서 제한된 '선택'의 기로에 놓인 한나가 떠올랐다. <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를 죽이는 방법 밖에 없었던 제한된 선택 이후 재판을 받게 되는 인물이다.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는데도 그런 선택을 한 한나를 유심히 살펴보고 이런 제목의 독후감을 썼기 때문에 유독 기억이 난다. '수치심에 잡아먹힌 한나'라는 제목으로 아래 링크의 글을 썼었다.

https://brunch.co.kr/@yjr01/55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한나를 지배하게 되는 것인데 이때의 수치심은 글을 못 읽는다는 부끄러움이었다. 어쩌면 성폭행 외에도 수치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일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떤 문화권에서 살았는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해결방법이 다양한 것처럼 수치심이라는 감정 또한 마찬가지다. 부제에도 적힌 '방대하지만 단일하지 않은 성폭력의 역사'처럼 수치라는 감정이 다양한 상황에서 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게 된 것 자체만으로도 큰 성과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희생자의 병리화


 트라우마라는 개념이 희생자를 병리화했다는 개념이 사실 가장 충격적이었다. 최근에 본 영화 <괴물>도 같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했던 대사가 바로 '나 불쌍하지 않아'였었다. 희생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불쌍한 연민의 존재로 나에게 받아들여져 왔다. 어쩌면 내로남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겪은 어쩌면 희생자의 위치로 전락하게 만드는 일은 함구하면서 스스로 불쌍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반면 누군가의 불행한 일을 생각하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말이다.


 PTSD나 트라우마 개념 모두 누가 그 언어를 만들어냈고 정의했는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언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꽤나 높은 위치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희생자가 되어보지 못한 시간들로 이루어진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최약 한 사람들에게는 폭력이 일상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나도 그렇다. 전쟁이나 일상적인 학대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싶다. 그래서 이런 책이 반갑다. 나에게 새롭게 알려주는 책이었기에 의미 있었다.


 병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해보고 싶다. 농약을 듬뿍 쳐서 겉보기에 반지르르한 사과와 애벌레가 갉아먹은 흔적이 있는 사과 둘 중에 당연히 전자가 많이 팔릴 것이다. 겉모습에 치중해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나 자신을 꾸민 지 오랜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다. 조금씩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사실은 정상일 것이다. 정상성이 표준분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했을 때.


 희생자를 병든 사람으로 만들면서 자동적으로 병들지 않은 사람들이 권력을 쥐게 된다. 이 책뿐만 아니라 병이라는 정의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 일상적인 많은 인사들이 이제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난관 속에 빠져버렸다. 일례로 '건강 잘 챙기세요'와 같은 것처럼 좋은 인사처럼 여겨지지만 건강하다는 기준은 과연 누가 정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역시나 영화 <괴물>에서처럼 행복이란 모두가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건강 또한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행복하지 않으면 뭐 어떤가 언제나 행복할 수 없는데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건강하다고 다행이라 생각한다면 언제든 건강을 빼앗길 수 있다고 그건 단지 확률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아가려면


 어떤 사회를 평가할 때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다루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전쟁과 같이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곳에서 어린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게 된다. 지금은 자본주의가 돈의 논리를 통해 취약함을 드러내게 하고 있다.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볼 수 있다. 이전에 읽었던 <노랑의 미로>, <가난의 문법>, <빈곤 과정>에서 처럼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성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질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너무나 뻔한 말이지만 다양한 가치가 존중받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돈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모두 장악하는 것이 아닌 상황말이다. 지금은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문제를 인식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 장의 핵심 개념은 취약성이다. 취약성은 '상처'를 뜻하는 라틴어 vilnus에서 왔다. 취약하다는 것은 상처나 피해를 받기 쉽다는 것이다. 물론 지각이 있는 존재는 모두 취약하다. 우리가 유한한 수명과 몸을 가진 생명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 때문이기도 한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에세이 <폭력, 애도, 정치>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우리 신체가 가진 사회적 취약성 덕분에 정치적으로 구성된다.... 상실과 취약성은 우리가 다른 신체와 이어지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신체라는 데에서 오는 것 같다. 다른 신체에 노출되면 이런 관계를 잃을 위험이 있고, 이런 노출로 인해 폭력을 겪을 위험이 있다. 136-137
성 학대 행위는 젠더화된 노동의 산물이며 그 노동은 정치적이다. 225
여성들은 무장 분쟁에서 성폭력의 가해자인 동시에 희생자였다는 사실이다. 여성 희생자들이 경험한 권력 불평등과 불의는 그들을 가해자로 바꾸어놓았다. 242
많은 무장 분쟁에서 '선택'의 서구 신자유주의적 수사에 호소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여성들은 '다른 여성을 강간하고 신체를 훼손하고 살해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강간당하고 신체 훼손을 당하고 살해해당할 것인가'라는 '선택'에 직면한다. 희생자들은 특권과 기본적 생존을 대가로 억압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다. 그들의 '선택'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246
공동의 보복은 그 밑에 깔린 불평등을 건드리지 못했다. 보복하면 기분은 좋을지 몰라도, 성별화된 폭력 문화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288
자경주의적 정의는 가부장적 카스트, 계급, 인종, 종교적 권력 체계를 공고화하는 데 이바지하는 경우가 더 많다. 289
PTSD진단은 사회나 개인의 삶의 경험에 고유한 나쁜 사건은 배제한다. 무엇보다도 이 증후군은 심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불린다. 학대에 이후가 있다는 생각은 폭력적이지 않은 이전이 있다는 가정에 기반한다. 그런 생각은 폭력에 시간제한이 있고, 일상생활로부터 구별해 낼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전 세계의 많은 곳에서는 사정이 그렇지 않다. 취약한 사람들은 폭력이 늘 벌어지기 때문에 일어나도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악몽, 땀을 줄줄 흘리는 것, 떨림, 플래시백도 비슷하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심리적 트라우마의 언어는 성적 학대와 같은 나쁜 사건들이 가난, 가부장제, 인종적 편견과 같은 문제와 연결되어 고질적으로 일어나는 경우에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378-379
트라우마 개념이 여기저기에서 강간 희생자에게 적용되면서 네 가지 중요한 효과가 발생했다. 그것은 강간 희생자들의 학대 이후 처신에 영향을 미쳤고, 희생자의 병리화를 이끌었으며, 치료 체제에 영향을 주고, 결국 권력의 위계질서를 공고히 했다. 382
횡단의 정치 각자가 자기 관점에서 세계를 인식하며, 그러므로 모든 지식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다는 믿음을 기본으로 한다. 유발데이비스는 정체성 정치학(우리는 누구인가)에서 목표지향적 정치학(우리는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가)으로 이동할 것을 호소한다. 417

 성폭력에서 성을 빼고 폭력에 집중해야 한다. 성을 넣음으로 인해 특별한 케이스를 만들어 본래 의미를 지워버리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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