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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고므 변리사 Sep 01. 2023

힘들다 힘들어 수습변리사

#10 슬럼프

내가 입사한 때가 마침 바쁜 시즌이었다. 명함이 나온 부터 매일 야근을 했다. 변리사는 바쁜 시즌을 한번 겪고 나면 훅 성장한다고 하는데, 애초에 나는 바쁨을 감당하는 방법조차 아직 모르는 상태였다. 그래도 신입 사원으로서 뽕이 있었다. 나는 열심히 할 거야. 야근도, 회식도, 일도 열심히 했다. 사실 효율이 있었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은 못하겠다. 은 얼마나 오래 앉아있었느냐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범한 수습이 별 수 있나, 요령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지. 그렇게 무더위가 지나고, 단풍이 물들고, 눈보라가 내리는 동안, 여전히 나는 일을 했다.


연말이 되자 막바지 실적을 채우느라 바쁜 기업들은 특허를 쏟아낸다. 우리의 일더미도 쌓이기 시작한다. 다이어리는 수많은 마감으로 빽빽했다. 차분히 계획을 세워본다. 오늘 밤새워 보고서를 작성하면 내일은 내일 마감인 보고서가 있고 모레는 또 모레의 보고서가 있다. 쏟아지는 업무는 시지푸스의 바위와 같았다. 압박감에 쌓여 새벽까지 일하는 날이 늘어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무실에 처박혀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곁에는 항상 동기들이 있었다.


길가에 쌓인 뽀얀 눈을 밟으며 우리는 허여멀건한 곰탕을 먹으러 갔다. 나는 수저가 놓이기도 전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J 오빠가 물었다. "너 일이 도대체 몇 개야?" 나는 하루에도 수도 없이 보는 캘린더를 다시 열며, 답답하기만 한 일정을 읊으려다, 그냥 눈물을 흘려버렸다. 동기들은 모두 말이 없어졌다. 나는 엉엉 울기엔 곰탕집이 회사와 너무 가까워서 훌쩍훌쩍 우는 걸로 타협을 했다. 동기들은 소주를 시켰다. 소주잔의 주인이었을 나는 들어가서 다시 일을 끝내야 한다고 막상 한 방울도 안 마셨다. 동기들이 대신 마시고 취했다.


맨 정신으로 꾸역꾸역 일을 마친 나는 퇴근길 심야 택시 속에서 일기를 쓴다. 제목은 내가 힘든 이유. 첫 번째, 바쁜 생활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 내가 수습이라서 힘든 것인지, 아니면 변리사 생활을 하는 동안은 계속 힘든지, 이번주 밤을 새우면 다음 주는 푹 잘 수 있는 건지. 바쁨의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바쁨 그 자체보다 더 힘들었다. 두 번째로는 보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일을 쳐내고만 있었다. 심혈을 들여 쓴 보고서가 수정사항을 덕지덕지 달고 올 때도 있고, 허접한 보고서를 보냈는데 가뿐히 통과될 때도 있다. 그 속에서 나는 자꾸만 요령을 부리려 한다. 열심히 일한다는 의미도 퇴색되었다.


미완성인 발명을 어떻게든 특허 등록 시켜보겠다고 발명자에게 보완 자료를 달라, 더 빨리 달라 닦달할 때는 내가 나 좋자고 이러나 싶다. 그렇게 고생하고 더 이상 꼴도 보기 싫은 보고서를 송부했을 때 클라이언트의 '수고하셨습니다 변리사님' 이 한마디에 맘이 스르르 녹는다. 그 말에 또 속아 일을 열심히 한다. 좋은 클라이언트는 좋지만, 싫은 클라이언트는 정말 싫다. 뭘 해도 꼬투리만 잡는 것 같아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인간관계 스트레스가 거의 없는 변리사라지만, 특허사무소 구성원끼리의 갈등이 없는 것이지 클라이언트를 대하는 스트레스는 나에게 꽤 크다. 내가 말단인 수습 변리사여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사무소를 직접 이끄는 입장이 되면 다르려나? 이 글을 보시는 대표님이 있다면 부디 대답해 주세요.


회사 앞 카페에 들러 커피를 빨고 있으면 바쁘게 서빙하는 직원이 눈에 들어온다. 저분은 일이 적성에 맞을까? 월 천을 번다는 의사 친구한테도 물어본다. 너는 일이 힘들지 않아? 나의 물기 어린 질문에 엄마는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그냥 일하는 거라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내가 유난인 걸까.

변리사이기 전에, 처음으로 사회에 나온 어린이의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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