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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by 커피탄 리

산머리 위로 비가 내렸다. 건물 머리 위로 비가 내렸다. 머리 위로도 비가 내렸다. 나는 비를 맞으며 젖어 번들거리는 포도 위를 걷고 있었다. 가스등 불빛, 포도 위로 빛이 내렸다. 나는 그 빛에 닿으면 나 자신이 성스러워지는구나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절박한 심정. 뭐가 그리 절박했는지 알지 못했다. 덜컥, 누군가 내 마음 문을 열어젖혔다면 왈칵, 눈물을 쏟았을지도 몰랐다. 실연을 당한 것도 아니었고, 어떤 심각한 사건으로 인해 감정적 위기를 맞은 것도 아니었는데. 뭐가 그리 절박했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불안했고, 그녀의 단짝인 우울에는, 우울의 너그러운 품에는 이미 스며들어 있었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5년 전의 그 사태밖에 없었는데, 그게 그리도 내게 컸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나는 이미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4층에 있는 음습한 좁은 집의 좁고 곰팡내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침대에 바로 누울 생각이었는데, 창가에서 소리가 들려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랬더니 웬 박쥐 떼가 산타클로스라도 되는 것처럼 창문을 마구 두드리고 있었다. 창문 밖을 얼핏 보니 밤의 잿빛 노래에 눈이 감긴 달은 안개의 입김에 젖은 채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구름은 여유로운 돛단배처럼 밤의 강을 흐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문을 두들기는 박쥐들이라니, 날 열심히 찾는가 보다 하고 침대에 누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고, 박쥐들이 내게로 날아들도록 했다. 박쥐 떼의 등에 내 두 발을 차례로 올렸다. 그 길로, 비 내리는 하늘을 기우뚱거리며 날기 시작했다. 나는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차가운 빗물들을 붙잡고 감정의 응어리를 털어놓았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잠이나 자는 달과 별들을 큰 소리로 저주하기도 했다. 이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날개 큰 박쥐들은 날 싣고 마천루 사이를 기분껏 비행했다. 높은 마천루들과 그것들과 대비되는 낮은 주택들이 보였다. 그것들과도 대비되는 허름한 판잣집들이 보였다. 그곳에 사는 생명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잠시 떠올려 보기도 했다. 내게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잿빛 물체들이 가득한 잿빛 꿈이었다. 다른 것은 상상할 수 없었고, 애초에 내 상상의 나래는 날개를 잃고 추락했다. 나는 비가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뭐라 소리치려고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고삐를 억세게 쥐었다. 박쥐들은 대교와 연안의 부두와 배들의 머리 위와 섬들을 지나갔다. 멀리서 동이 떠오르는 것 같았는데, 하늘색은 여전히 흐렸다. 나를 실은 박쥐 떼는 먼 섬으로 날아갔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해변에 드러누워 잠들었다. 날이 어두침침해 해변인지 갯벌인지 알 수 없었다. 오로지 촉감으로만 분별해야 했다. 갯벌임이 드러난 것은 해가 뜨기 전이었다. 등이 축축하고 끈적끈적했다. 나는 조개껍데기 같은 것을 하나 잡아 바닷가 쪽으로 던졌다. 이윽고 동이 터 왔다. 하늘은 주홍빛 광선의 층과 회청 빛 구름의 청과 연회 빛 하늘의 층으로 나뉘었다.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 쪽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셀 수 없이 많은 가리비 떼가 캐스터네츠처럼 울리며 합창을 하고 있었다.-그러고 보니 박쥐 떼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껍데기를 발고 한 여인이 바다 쪽에서 걸어 올라왔다. 그녀의 피부는 새빨간 색이었고, 머리털은 웨이브가 있는 갈색이었다. 그녀는 공작 털이 달린 벨벳 모자를 쓴 것 빼고는 아무것도 입거나 걸치지 않았다. 그녀의 나신은 출렁거리는 바다 물결 같았다. 그녀는 내게로 와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등에 이물질이 묻은 것도 잊은 채 나는 그녀와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가리비들이 여전히 합창을 하고 있었고, 파도가 묘한 멜로디를 연출했다. 그녀는 귀엣말로 내게 자기 이름이 ‘아시리아’라고 했다. ‘아시리아, 아시리아’하며 나는 그녀의 이름을 익히려 노력했다. 우리는 큰 배가 항해하는 것처럼 춤을 췄다. 몇 번의 하늘, 몇 번의 땅이 바뀌는 줄도 몰랐다. 우리는 적어도 몇 세기 동안 춤을 췄다. 내 머리털은 점차 하얘졌다. 춤을 췄지마는 마음이 행복하지 않았다. 약간 신났을 뿐이었다. 허무하고 외롭기도 했다. 하루 종일 어떤 상대와 함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 존재에 대한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다. 내 가슴속에는 채워지지 않은 방이 있어, 그 방의 크기는 볼링공 만한 크기로 벌어져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건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다. 채워도, 채워도 끝없이 깊어지기만 해서, 어떤 특단의 조치를 쓰지 않고는 영원히 아물릴 수 없는 듯해 보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나는 그녀, ‘아시리아’의 표정이 여러 번 바뀌는 것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녀가 내게 성을 내고 있을 때, 부둣가 쪽에서 누군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 사람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밀짚모자 아래로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젊음이 내게 아직 남아 있던 시절, 내가 사랑했던 여자인 민주였다. 그녀는 품에 꽃바구니를 들고 우리 근처로 다가왔다. 젖은 풀 사이에 묻힌 작은 꽃을 하나 꺾어 꽃바구니에 넣었다.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려 했지만, 아시리아는 그녀의 두툼한 입술로 내 입을 막았다. 나는 눈알을 필사적으로 굴리며 민주를 바라보려 했다. 민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와 아시리아 주위를 몇 바퀴 크게 돌다가, 다시 부둣가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그러더니, 한 제독 복장을 입은 늠름한 사내의 품에 안겨들었다. 나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 가슴이 세차게 울렁거렸다. 아까 설명했던 가슴의 구멍 즉, 허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순간 내게 닥친 감정의 비극만이 중요했다. ‘아시리아’ 부인을 뿌리치고 민주가 있던 쪽으로 달려갔지만, 그곳엔 그녀가 남기고 간 밀짚모자만 있었다.



꽃들이 있는 언덕에 앉아 있었다. 절벽 아래론 푸른 바다가 보였다. 파도가 하얀 혀를 내밀고 가볍게 찰싹거리는 모습, 갈매기가 작은 돛단배 주위를 크게 도는 모습이 정다웠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푸르고, 구름들도 동화 속에 나오는 구름들처럼 정겹고 아름다웠다. 모든 세계가 저 구름을 통해 연결될 것이었고, 모든 세계가 저 바다로 이어질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우울해졌다. 세계 따위, 연결될 세상 따위, 오지 않는다면 좋을 것을. 그럼 인간의 추한 면은 덜 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덕분에 인간이 얼마나 심각한 존재인지. 인간이 얼마나 텅텅 비었는지, 영혼의 눈으로만, 볼 수 있었다. 내가 헤쳐 나가야 할 길을 생각하면, 한없이 괴롭고 우울해졌다. 바람을 타고 불안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렇다고 바람을 어떻게 저주할 수 있을까? 그럼 호흡을 저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호흡을 저주하면, 생을 부정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나는 생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아시리아니 민주니 하는 이름들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 두 이름이 어딘지 먼 세상의 이름들인 것만 같았다. 그들의 얼굴은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고, 지금의 나와는 무관한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불안했다. ‘저 바닷속 깊은 곳으로 빠져들 것이다’하고 생각했다. ‘옛날에 물이 불안을 안정시킨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물의 제일 근원적인 곳인 자궁으로 가면 어떨까?’하곤 생각을 곧바로 실천으로 옮기려 했다. 나는 절벽 끝으로 달려갔다. 풍덩!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창문에 일렁이는 햇살, 바람에 꽃들이 떨리는 소리, 나무 위의 새소리가 무척이나 생경했다. 발밑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는데, 무슨 책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무작정 그 책을 읽었다. 마음속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책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 책의 줄거리가 무엇인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병원 앞에는 숲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내게 따뜻함을 느끼게 해 준 책을 들고 숲으로 향했다. 어릴 적 이야기책 속에서나 들었던, 요정들과 정령들이 날 반겨 주리라고 생각했다. 박쥐를 타고 모험도 했는데, 요정과 정령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난 숲으로 갔다. 숲 속 깊은 곳으로 갔으나, 요정이나 정령은 곱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숲의 끝 절벽 쪽에, 키가 무척 큰 나무 아래를 서성이는 사내와 그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는, 목수 같아 보이는 사내밖에 보이지 않았다. 목수 같아 보이는 사내는 나무로 집을 만들고 있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두 사내가 손을 맞잡더니, 하나의 사내로 합쳐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한 명의 사내는 내게 팔을 벌리고 뭐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귀에서 고름들이 흘러나와 땅의 풀을 녹였다. 눈에서는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 그때 새하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민주가 숲 속 어딘가에서 나타나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민주는 내게 안겨들었다. 나는 그녀의 향기에 취했다. 나는 잠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얼른 정신을 바로 차렸다. 앞을 보니, 내게 팔 벌리고 있던 존재는 사라지고 없었다. 목수 같은 사내가 만들고 있는 집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그 집의 문이 열려 있었는데, 그곳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민주의 손을 잡고 그리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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