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 담배 피우는 남자의 옆, 해 질 녘, 100F, Oil on canvas, 2025
모든 사람이 내게, '잘 지내지?' 혹은 '졸업 전시는 잘 준비돼 가고?'라고 물을 수 있어. 그때 나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일단은 웃으면서 대답하겠지, 그렇다고. 그런데 속으로는 괴로워할 거야. '내게 할 말이 이것밖에 없냐고.', '나는 여럿에게 이 말을 동시에 듣는다고.' 또 내 마음속에선 속삭이지. '사람들은 너한테 그리 관심이 없다고.' 그때 나는 내 목소리들 가운데 하나를 수용하지 않고, ‘그들이 나한테 보이는 호의이자 관심이야’라는 생각으로 원래의 생각을 변환할 거야. 이게 성숙한 생각이겠지. 이건 내가 생각해 낸 거야. 하지만, 나는 이것 말고도 많은 소리들과 싸워야 하고 결과적으로 난, 해 질 녘에 여기 옥상에 주저앉아있어. 당신이 내뿜는 담배 연기가 또 하나의 구름으로 변환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난 떨어지고 싶어. 그러지도 못해. 내 자아는 수백 개라. 당신들처럼 떨어지고서도 기어 올라오는 것들이 있거든. 당신은, 당신의 몸에서 쪼개져 나간 수백의 작은 당신들이 당신을 떠나는 걸 보지. 창문에서 보면 그들이 잘 보일 테지. 그들은 아주 천천히 떨어져 내리고 있으니까. 자신이, 한줄기 비라고 생각하는 저 수많은 방울들이. 난 어딘지 쓸쓸해. 쓸쓸할 일도 없는데 자꾸 쓸쓸해.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는데 난 쓸쓸해. 난 사랑에 너무 쉽게 빠져서 쓸쓸해. 난 혼자인 게 편해서 쓸쓸해. 혼자서 시간을 너무 많이 날려 보내서 쓸쓸해. 가끔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쓸쓸해. 사람들이 내게 조언이라고 건네준 말 때문에 한없이 쓸쓸해. 곁에 누군가 없는 것도 아닌데. 누군가 내 모든 책을 열어서 그것을 읽고서 내 책의 내용을 해석해 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겉표지로만 드러나는 것들 말고, 내가 진짜 쓰고 있는 것들, 내가 해온 그 노력들, 그것이 정말로 뭘 의미하는지 알아봐 줬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그게 내 연인이라면, 그대는 내 인연이겠지. 연인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지구상의 단 한 사람이라도 알아봐 준다면. 하지만 그건 성숙한 생각이 아니겠지. 성숙한 사람도 아니고, 성숙한 나도 아니야. 꿈에서 옛 스승을 만났어. 그분에겐 죄송한 게 많았는데, 그분과 동료들에게 크게 꾸지람을 듣고서 멋대로 난 그들을 떠났어. 변명을 늘어놓자면, 그날 난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어. 내가 해온 노력은 온데간데없고, 나의 실수만 크게 부각되어 보였으니 말이야. 다르게 말하면 날 알아봐 주는 이는 없고 날 오해하는 이만 있었다고나 할까. 물론 알아봐 주길 원하는 건 본능이지만, 그건 날 것의 성숙하지 못한 나야. 그게 분명해. 꿈에서 그분을 보았어. 내가 그분이 있는 장소로 찾아갔고, 그분은 날 맞아 주었지. 밥이라도, 차라도 하고 헤어지자는 말을 누가 먼저 꺼냈는지는 몰라. 내가 꿈 이야기를 왜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아무튼 난 잠시 어디 들릴 데가 있다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그분에게 말했어. 그리고 포토 스튜디오로 갔지. 거기서 프로필을 수정해야 했었는데, 대기 줄이 많았고, 30분이나 낭비했어. 난 급하게 스승이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달려갔지. 그런데, 여전히 그분은 자리에 앉아 계셨어. 나는 마음이 어두워졌지. 같은 실수를 다시 한 것 같아서. 아니, 이번에는 그가 나를 영영 떠날까 봐. 그래서 나는 쓸쓸해. 그래 ‘누군가 나를 영영 떠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 나는 그 생각에 좀처럼 과감한 행동을 하지 못해. 내가 싫은 것을 싫다고 이야기하지도 못하지. 나와 같은 심정을 가진 네게, 널 위해 이 말을 하는 것도 아니야. 난 그저 내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난 들어주기만 할 뿐, 좀처럼 내 이야기를 면전에서 늘어놓지도 못하는 사람이니까. 그게 내 가식이고, 그게 내 가면이야. 나는 매일 밤 가면무도회에 나서는데, 가면을 열 장, 스무 장씩은 품에 숨기고서 무대로 나서지. 그러곤 사람을 낚아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탁한 공기와 테이블 위의 먹다 남은 케이크 조각을 잔뜩 챙겨 오지. 그게 내 인간관계야. 그게 내가 인간이라 믿는 거야. 그것들은 두려움이란 이름으로 불리지. 난 날마다 두려워해. 또다시 사람을 만나기를 두려워한단 말이지. 그래서 난 쓸쓸해. 크리스마스이브 같은 날에도, 좀처럼 누군가의 집에 찾아갈 수 없거든. 내가 누군가의 두려움의 집 문을 열어볼까 봐서 두려워하며. 그저 사람들이 많은 곳을 떠돌 뿐이야. 이름도 모양도 없이, 사람들이 나를 나무나 낙엽쯤으로 생각하도록 그렇게 몰래. 스승이 있던 모임의 누군가 내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지. 내 글에 '나는'이라는 주어가 너무 많은 것의 이유라고 했지. 그렇지만 난 동의할 수 없었어. 나는, 그저 나도 모르는 새에 '나는'이라는 글자를 적은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무슨 애정이 들어가 있거나 그러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어. 무슨 이유에서인가 나는 내 말을 할 수 없었고, 사람들의 뇌리 속의 나는…. 말 안 해도 너는 알겠지. 물론 내가 진짜로 나를 끔찍이 아끼는지도 몰라. 내가 모르는 나는 말이야. 그게 남들 눈에 기괴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쩌면 나는 실제로 미쳐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나는 쓸쓸해. 이제 '쓸쓸해'라는 단어는 금기어가 되어 버렸어. 내 안에서도, 사람들 사이에서도.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역해서 토해 버리고 말 거야. 사람들에게 누군가 쓸쓸하다는 말은 비위 상하는, 거친, 덜 성숙한, 날 것 같은 말일뿐이거든. 누구도 그런 부담스러운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아. 이 또한 내 망상일 뿐이지만, 그런 말은 내가 두려워하는 그들 사이에서 금기시하는 말이 되어버렸어. 해 질 녘에, 오늘처럼 당신이 피우는 담배의 연기가 구름이 되어갈 때, 난 옥상에 걸터앉아 정면을 바라보지. 해와 우거진 삼림들 그리고 빌딩들과 인간의 교차로. 저기 나갈 생각을 하면 가슴이 막막해. 병실에 들어앉은 환자가 된 기분이지. 치료받을 수 있는 차원의 문제라면 좋겠어. 내가 쓰는 글에 비해 나는 너무 작고 어려. 누군가는 또 이 문장들을 보고 날 훈계하려 들 수도 있겠지. 낙이 없어. 책을 읽는 것도, 산책을 하염없이 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은 더욱이 낙이 아니야. 글 쓰는 것, 이것만은 배설 정도는 되어서 내 속을 시원하게 해 주네. 초원도 아닌 곳에서, 초원보다 더 넓고 빛나는 곳에서 누군가 ‘진짜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시작이자 끝인 곳에서 날 기다리는 존재가 있다면, 그게 믿어진다면 무료하고 쓸쓸한 세상 따위 버티지 못할 이유도 없을 텐데. 내가 사람 만나는 걸 더는 버티지 못하고 미워한다 해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