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가 내리니
세상이 시드는구나
둥근 사기그릇에 담긴
귤도 썩고
발에 바스락 채이는
낙엽도 썩어가고
흐린 구름 속에서
노을도
날마다 검게
타들어간다
새벽에 창틀로 새어드는
찬바람에 막힌 코
눈과 귀로만 세상을
머금고 오물조물거린다
낙엽이 길을 만드는 것 같아
새소리가 그리로 이끄는 것 같아
길 끝에는 누군가 서 있는데
가을볕에도 졸지 않고
찬바람에도 휘날리지 않고
목소리도 없는
그는
형상의 담벼락에
갇혀 있지 않네
낙엽이 덮인 길
그 길 따라 갈지자로 걸어가면
잎 떨어진 나무들과
새 울음소리
낙엽 쓰는 소리뿐
그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내 마음속 빨간 십자가 나무에는
날마다 새롭게 순이 돋아나네
길 끝의 첨탑 끝의
십자가 위로
구름이 어둔 그늘을 짓고
몇몇 교인들이 그 집으로 들어가네
낙엽 타는 소리
고구마 타는 냄새와,
가을 녘은 저물어 가는데
마음속 빨간 십자가 나무에는
날마다 새롭게 순이 돋아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