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의 치유적 기능 "자기서사화" 2편

- '흰 바람벽이 있어'를 중심으로

by 시샘 김양경

2편 -

앞에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대한 "자기서사화"에 대한 글에 이어 이번에는 백석의 대표 명작이라 할 수 있는 <흰 바람벽이 있어>라는 작품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 작품 역시 문학치유의 주된 기능인 "자기서사화(Self - Narrative) 과정이 잘 드러난 작품 중 하나이다. 텅 빈 바람벽을 스크린 삼아 자신의 내면을 투사하고, 그 안에서 결핍을 직시한 뒤 새로운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을 단계별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흰 바람벽이 있어>의 "자기서사화(Self - Narrative)" 과정 분석


1 진단 단계, 결핍과 불안의 직시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화자는 좁고 침침한 방안에서 '흰 바람벽'을 마주한다. 여기서 바람벽은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자 서사가 시작되는 공간이다. 화자는 현재 자신의 상태를 '쓸쓸한 것'으로 '지치운 불빛'으로 진단한다. 이는 사회적 성취나 화려함이 사라진, 철저히 고립되고 결핍된 자아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서사의 출발이 된다.


시낭송 시샘-전체 사진-75672644644.jpg 제5회 백석시노래말꽃놀이는 26년 2월 15일에 개최되었다 - 흰바람벽시낭송아카데미 원장 김양경



2 객관화 단계, 감정의 객관화와 반추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뿐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화자는 바람벽에 지나가는 환영을 통해 어머니와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본다. 이는 기억 속의 인물들을 벽이라는 외부 매체에 투영함으로써 심리적 거리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그리움과 외로움을 주관적인 감정으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객관화하여 바라봄으로써, 격정적인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관조한다.


3 통찰 단게, 운명적 수용과 거리 두기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화자는 자신의 고통이 개인의 무능이나 우연한 불행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설계된 운명적 필연성임을 깨닫는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는 고백은 자책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고통의 원인을 거대한 운명의 질서 안으로 편입시킴으로써, 현재의 결핍을 부정해야 할 대상이 아닌 수용해야 할 삶의 조건으로 통찰하게 된다.


4 서사의 재구성 단계, 새로운 자아정체성의 확립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이라 릴케’가 그러하듯이


마지막 단계에서 화자는 자신의 가난과 외로움과 쓸쓸함과 같은 결핍을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과 같은 고결함의 증거로 재구성을 하고 있다. 자신을 단순히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초생달, 바구지꽃, 위대한 시인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둔다. 이로써 '가난한 자아'의 서사는 '하늘이 사랑하는 고귀한 존재'의 서사로 승화되며, 치유적 완결을 이룬다.


마무리

<흰 바람벽이 있어>는 화자가 자신의 내면을 외부의 '흰 바람벽'에 투사하여 객관화하고, 고통의 원인을 운명적으로 통찰하며 최종적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고결한 상징물과 연결하여 긍정적인 서사로 재정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자신의 상처를 어떤 과정과 단계를 거쳐서 풀어내어 서사화하고, 치유해 내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낭송 시샘-전체 사진-72987379184.jpg 백석시낭송대회 수상자들의 수상 소감 발표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뿐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이라 릴케’가 그러하듯이


30세 - 1941 4. 『文章』3권 4호.



백석시낭송공연 일정

참가신청 => https://forms.gle/b1C4voxStNNSnpit5

8회차 2026년 5월 17일 일요일 오후 3시

9회차 2026년 6월 14일 일요일 오후 3시


백석시낭송대회

26년 10월 25일 일 오후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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