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6월이면 탐스럽게 그 해사한 얼굴을 드러내는 수국은 우리집의 자랑이다. 몇 년 전 남편이 몇 포기 사다 심었을 뿐인데 해마다 선물처럼 풍성하게 피어났다.
난 그 꽃을 한아름 꺾어다 집안을 장식하기도 하고 집에 손님이 오면 한송이씩 선물하기도 했다. 수국을 받아든 사람의 얼굴은 꽃보다 더 밝아지곤 했다. 올해도 장미가 질 때쯤 사람들에게 이제 수국이 엄청 피어날테니 맘껏 꺽어가도 된다고 미리 선심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6월 중순이 되고 7월이 되어도 우리집 마당의 수국은 피어나질 않았다. 가장자리로 몇 송이가 피는듯 하다가 금세 시들어버렸다. 작년까지 그렇게 많은 꽃을 피우더니 뭐가 문제일까 하고 궁금해하니 남편은 조금 늦게라도 필거라고 했다. 바로 옆집 수국은 이파리보다 많아보이는 꽃이 잔뜩 피었는데 왜 안피는 걸까...? 기다리고 기다리다 어느 순간, 올해는 꽃이 안피나보다 포기할수밖에 없었는데 그 포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마치 다른집 아이들은 일어서고 걷고 뛰는데 우리 아이만 아직 앉지도 못하는 것 같은 마음이었다.
수국이 피어나길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지난 여름은 개인적으로도 참 힘든 시간이었다.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50이라는 나이가 주는 압박감이었을까? 전업주부로 나름 분투하며 살았지만 딱히 눈에 보이는 뭔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자괴감이었을까? 무리해서 아이들 가르치는 알바를 시작하고 수많은 계획을 세워 몸을 바삐 움직였다. 책도 더 읽어야 하고 글도 더 많이 쓰고 공모전에도 응모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무지 쉴 틈이 없었다. 고3인 아들아이 챙기는 것도 힘에 부쳤다. 6시부터 한라수목원을 걷는 아침운동도 시작했다.
그렇게 한 두달을 보내고 나는 몸져 누웠다. 개도 안 걸린다는 감기에 걸리고 그 감기는 나을 줄을 몰랐다. 요즘 같은 시국에 감기라니... 결국 코로나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하루 동안 별의별 상상을 다 하며 악몽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다행히 음성이었지만, 2주 가까이 앓고 나서 내 몸무게는 3킬로나 빠져 있었다. 안그래도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었는데 내 모습은 그야말로 종이인형같았고 금세 부스러질 듯 안쓰럽기만 했다.
심하게 앓고 나니 '몸이 먼저다'라는 책 제목이 떠오르면서 우선 몸부터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무리하게 하던 일들을 모두 뒤로 미루고 내 몸만 챙기며 일주일 정도 쉬었다. 백신을 맞고나서는 더 몸을 챙기며 집에서 뒹굴거렸다. 이렇게 살아도 될 것을 왜 그렇게 안달하며 살았을까? 최근 몇달간 내 안에서 스카이캐슬의 염정아가 나를 닦달하고 김쓰앵님이 주도면밀하게 날 조종하고 있었다는 느낌.
결국은 쉼과 여유가 필요한 시기에 나 자신을 몰아세워 병을 얻은 것이었다. 쉬어야 할 땐 쉬어야 하고 힘들면 또한 쉬어가야 한다. 그래도 된다. 그렇게 자신을 돌봐야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에도 몰두할 수 있다.
이렇게 호되게 앓는 동안, 마당을 내다 보면 여전히 수국은 이파리조차 시들시들했다. 하지만 이젠 꽃이 피지 않아 속상한 마음보다는 기다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 한 해 푸~욱 쉬고 나면 내년엔 또 다시 탐스런 꽃을 피워낼 것이다. 사람이나 꽃이나 쉬어가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