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상첨화
비단 위에 꽃을 더한다는 금상첨화는 좋은 일이 겹칠 때 쓰는 흔한 말이다. 하지만 비단에 정말 꽃을 놓으면 망한다. 모든 ‘천연’자가 붙으면 흔히 그렇듯 비단도 누에고치에서 얻어지는 천연섬유로 관리가 까탈스럽다. 양반으로는 못 살 내 성격에, 비단이 그림 재료로는 정말 최악이다.
적당한 농도의 풀을 쑤어 비단을 나무 틀에 붙일 때마다 상상이 되는 감촉이 있다. 어릴 때 풀을 종이에 잔뜩 문지르고 비닐을 붙이면 한 번에 쫙 붙질 않았다. 비닐이 얇으면 얇을수록 서로 엉겨 붙어 환장하게 만든다. 천천히 섬세한 손길로 살살 문질러 펴가며 원하는 위치에 맞춰야 하는데 그때의 그 미끄러운 감촉이 비단을 붙일 때와 똑같다. 힘 조절이 안 되면 삐뚤어 지는 것도, 시간 조절이 안 되면 쭈글쭈글하게 굳는 것도, 무엇보다 풀이 제대로 마르지 않으면 냄새 나고 곰팡이가 피는 것도 그렇다. 사방 힘이 고르게 전달되어야 주름진 곳 없이 반듯하게 펴졌다. 힘을 잔뜩 주고 모서리를 밀다가 찢어먹기 일쑤인 나는 비단이 버겁다. 그런 내가 비단에 그림을 그린다는 건 잠시 다른 인간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막옷을 입고 퍼질러 앉아 맘대로 그리던 자세를 잠시 조신한 규수로 탈바꿈을 하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속에서 천불이 난다.
다신 안 그린다 해놓고 또 비단을 꺼내 들었다. 사 놓은 것만 다 쓰자. 한복을 짓는 시어머니는 비단을 만지면 행복하시다던데 나는 한숨부터 나온다. 걸핏하면 물방울 자국을 만들거나 물감을 번져져 원래 그림을 자꾸 수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돌아보면 얼룩이 자꾸 생긴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꽉 채우기로 한다. 동양 그림은 여백의 미를 상당히 중요시 한다. 동양화 기법 중 하나로 붓질한 부분과 남은 부분의 조화를 살려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화면을 가득 채우면 오히려 시선이 분산되어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뭐 어때, 내 그림 내 맘대로 그리겠다는데!
오래 된 일이다. 어떤 개구진 남학생이 자기는 그림을 못 그린다며 계속 툴툴 댔다. 연상 작용을 시켜보려고 해도 도무지 할 의욕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니가 그리고 싶은 거 정말 아무거나 하나만 그려보라고 했다. 등을 돌리기가 무섭게 다 그렸단다. 하얀 도화지에 힘없는 선으로 그려놓은 동그라미가 보였다. 아무렇게나 그린 게 분명하다. 예쁜 색깔들을 다 마다하고 검정색으로 오른쪽 하단 구석에 힘없이 찌그러져 있는 동그라미. 놀 때는 상당히 활발하고 제일 개구장이인데 그림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깔깔깔 장난 치고 웃는 저 아이는 보기와 다르게 자존감이 낮고 상처가 있을 수 있겠구나. 그냥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그 그림을 들어 다른 친구들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 얘들아, 이 그림좀 봐. 00이가 어려운 그림을 그렸어. 동양화라는 그림을 그리는 방법 중에 여백의 미라는 게 있거든. 이렇게 빈 공간과 그림을 잘 어울리게 완성하는 그림인데 00이가 여백의 미를 살리느라 그렇게 고민이 많았나봐. 이 동그랗게 보이는 건 뭘 뜻하는 걸까? 친구들에게 말해줄 수 있니? “
한동안 여백의 미를 아주 많이 사용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대신 그림을 못 그린다는 아이는 없었고 내 책상에는 수많은 여백의 미를 살린 창작품이 쌓여갔다. 실로 놀라운 해석들과 함께. 아이들은 열어만 주면 알아서 나가는 것 같다.
도안을 이용해 초 뜨기(그림 본 뜨기&스케치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를 하는데 나는 마음대로 그린다. 어차피 내 그림들은 틀을 벗어난 ‘제맘대로’ 그림이다. 비단만의 깨끗하고 투명한 느낌을 최대한 살려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숲의 풍요로움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열린 그림. 닫힌 결말을 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탄생한 금상첨화다. 마음대로 그리니 속편해서 좋다. 마음에 든다. 수풀을 헤치고 나가면 즐거운 일이 생길 것만 같다. 비단 위에 꽃을 그렸으니 금상첨화, 그림에 글을 더하니 또 좋고 좋다.
하얗게 눈부신 곳에서 시계보는 토끼가 나올 것 같다. 이상한 앨리스의 화이트 래빗. 나를 데리고 다시 저 안으로 들어간다.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하지만 내 상상에 취해 토끼를 그려 넣으면 다른 이들의 상상은 멈출 것이다. 궁금하다. 어떤 상상을 하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