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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쩜반살롱 Sep 25. 2024

J를 보내며

후배작가의 죽음에 부치는 삶의 서

잘 알고 지내던 후배 그림책작가 J가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그림책도 여러 권 냈고 그림책을 음악공연으로도 구현해서 독자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주며 인기를 끌었었다. 재능과 열정이 가득했고 늘 흐트러짐 없이 자신과 주변의 관계설정을 정돈해 온 것으로 보인 J작가가 조금씩 신경쇠약증을 보인 것은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었다. 차라리 목숨을 버리는 극단으로까지 마음의 병이 깊었을 줄은 그녀의 어머니, 주변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조짐도 징후도 없던 부고에 귀를 의심하고, 누구에게도 맘껏 호소하지 못한 채 홀로 괴로움 속에 지냈을 J작가를 애도하며 말할 수 없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여러 작가들과 몇몇 출판관계자들이 빈소를 오고 갔다. 

작업실 정리를 위해 모였던 동료작가들이 각자 쓸 만한 물품들을 나눠 가져간 후 내게는 적지 않은 양의 종이더미가 맡겨졌다. 차에 종이를 가득 싣고 작업실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마음은 어수선했다. 다음날 오후 겨우 종이를 차에서 내려서 펼쳐 놓고 정리작업에 돌입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인쇄소에서나 쓸 법한 용지들을 전지 벌크로 얼마나 사 모아놓았는지 작가의 스케일에 혀를 내둘렀다. 전지로 된 두꺼운 백상지 한 묶음이 작은 박스에 둥글게 말려 웅크리고 있어 얼른 꺼내어 펴놓았다. 얇은 종이도 아니고 두꺼운 종이가 그렇게 말려있는 꼴은 참을 수 없다. 얼마나 오랜 시간 말려 있었던지 좀처럼 펴지지 않아 테이블 위에 펴놓고 무거운 종이 더미들로 눌러 놓았다. 이 많은 종이들이 생전 J작가의 불타는 열정을 보여주는 듯했다. 영차영차 종이들을 정리하는데 왠지 J작가가 옆에 와 서있는 것 같은 느낌도 설핏 들었다. 나에게 작업 좀 열심히 하라고 보내준 선물이라는 메시지도 울려오는 것 같았고.

남겨준 종이를 정리하고 있노라니 내가 현재 작업실에 갖고 있는 물품들, 품목은 다르지만 J작가보다 더 많은 사물들을 유품정리관계자 시점에서 둘러보게 된다. 이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이곳의 물리적인 요소들을 최대한 처리하고 치워 놓을 수 있기를 후배의 유품 앞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나는 이미 가고 없는 사람의 삶을 자꾸만 복기해 보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관계에서 가고 없는 그 사람과 남아 있는 '나'의 다르지 않은 점을 확인하고, 죽음과 삶의 한계선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한 의식의 일종이거나 죽음에 대한 유사체험의 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하는데 이르렀다. 

 세상에 '~때문'이란 게 있을지 모르지만 누가 타계하고 나면 더 살펴주지 못한 일들 등 아쉬웠던 점들이 자꾸 떠올라, 살아남은 자는 참담한 자괴감에 가슴이 쓰리다. 그의 인생에 그늘과 우울함을 드리웠던 흠결에 대해 곱씹어 보며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온 입장에서 뭔가 짚어보고 가고 싶어 진다. 

 죽고만 싶은, 죽으면 해결될 것 같은 그 기분이 드는 상황은 그대로 죽은 시간이다. 그러니 굳이 죽을 것까지 없음을 자각할 수 있다면 죽을 일은 없다. 살아 숨 쉬고 있지만 살아갈 의지가 꺾인 상황에서는 사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떼어내어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없다는 데에 맹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삶과 죽음이란 우리가 그렇게 선명한 구분선을 그을 만큼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만물이 다 그러한 것과 같이 '독'이란 것도 특정된 성질이 아니다. 이 또한 관계성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는 것. '독'과 '약'을 고정하여 설정된 '질서'아래에 어리숙한 패러다임을 전수받는다. 기꺼이 질서를 습득하여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스스로 속박되는 그것을 통찰하여 굴레의 허상에서 빠져나와 자유로워지기란 그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는 각자의 숙제이다. 주어진 틀 속에서 스스로를 갈구는 악순환을 끊어내기를, 그 길을 찾기를 나와 이웃들에게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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