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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잡스 유진 Dec 21. 2021

우리 엄마가 너보고 여우같대..

  <엄마, 유진의 초등생활 에피소드 편>

  

띵동~~~

“누구세요?”

“배달왔어요.”


찰칵, 아파트 현관문이 열렸다.

“어?”

“어....?”


“네가 왜...”

“아..그게..말이지.......우리 아빠 가게야.”


문을 열어준 사람은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던 남학생이었다. 

그것도 내가 평소 호감있어 하던 그 아이..

그 집에 치킨배달을 간 건 바로 나다.      

그 때가 초등학교 5학년..

인구 10만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시골동네이다보니 어쩔 때는 치킨을 들고 학교 선생님댁으로 배달간 적도 있다. 


지금부터 어쩌면 라떼(나때)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70, 80년대 이야기도 아닌 90년대 이야기이다.    

  


일생을 해운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육지에서 정착하기를 바라는 엄마의 간절한 희망에 못이긴 척, 치킨집을 오픈하셨다. 아메리카대륙의 한 나라 이름이 생각나는 그 브랜드는 그 당시에는 처가에서 파는 닭집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유명했다. 음식 솜씨가 남달랐던 엄마는 브랜드 회사에서 오는 양념에 본인의 비법을 첨가해서 꽤나 맛있는 양념으로 버무린 치킨을 만드셨다. 좁은 동네에서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고 장사는 쏠쏠하게 되던 때였다. 일손이 부족하고 지금처럼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쓰기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일찍 하교를 하거나 쉬는 주말에는 어김없이 가게로 가서 일을 도왔다. 기억날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정사각형의 냅킨 속에 나무젓가락, 이쑤시개, 그리고 껌 2개를 돌돌말아 통닭 상자를 고정시키던 노란 고무줄 위에 꽂아 같이 나갔다. 냅킨 싸는 일과 포장박스를 접는 일은 당연히 나의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손이 재빨랐던 나는 어른 못지않은 스피드로 박스와 냅킨을 접었다. 일당은 통닭 한 마리. 그거면 최고였던 시절이다. 


가게 안에서 소소히 일손을 돕던 나는 바쁠 때는 뛰어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의 배달을 하기 시작했다.좁은 마을 안에서 닭집딸에 직접 배달까지 다닌다는 소문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소문 난 거.. 나는 절대로 창피하지 않아.’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조금더 뻔뻔스러워졌다. 학교에 가면 창피함을 가리기 위해서였던지 더욱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고 다른 집 치킨 시켜먹다가 나한테는 걸리지 마라라고 으름장까지 놓을 정도였다.

소풍 때가 되면 선생님께 주문 받은 통닭과 아이들과 함께 먹을 통닭 3마리 정도를 들고 갔던 기억도 난다. 부끄러웠을 만도 한데,  그때부터 보통 아이는 아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는 본인이 잘하는 일을 하고 싶으시다고 하셨다. 두 번째 장사는 건자재상이었다. 경험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계셨다. 

'그렇다면, 큰딸인 나도 보탬이 돼야지...'

건자재상 일은 도와드릴 만한 일이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수백, 수천가지나 되는 물건의 이름을 외우기도 어려웠고 천차만별인 가격을 기억하기에는 더욱 버거웠다. 가끔 아버지 대신 가게를 봐드렸는데 크게 도움되지는 않았다. 


'그럼 내가 할 수 일은? '

  

어느날 학교에 사물함이라는 것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반마다 개인당 한 칸씩 쓸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개인사물함에는 교과서와 학교에서 필요한 준비물을 두고 다녔다. 개인적인 물건이 들어있다보니 한두 명씩 자물쇠를 채우기 시작했다. 


‘바로 저거다!!’


아이들에게 자물쇠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 한 학년이 300명 가까이 되었기에 자물쇠를 주문하는 친구들도 제법되었다. 그리고 학교까지 직접 배달서비스를 해주지 않는가? 편한 서비스는 쉽게 알아보는 법. 주변에 친한 친구들부터 옆반, 그리고 저 멀리 떨어진 끝반 친구들까지 주문을 해주었다. 

그때 이후로 미술시간에 필요한 먹물, 교실에 필요한 청소물품까지 주문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여전히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주문받고 있던 순간, 내옆을 지나가던 친구가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 엄마가 너보고 여우같대...”

 “응?......”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랬구나, 내가 그렇게 보였구나.’

그 한마디가 여전히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적잖이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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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하실 분들이 있으실 것 같다. (그럴 거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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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한테만 안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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