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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쿠아마린 Aug 15. 2021

귀뚜라미 울면 참새는 어디로 가나?

여름이 가고 있다.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들어가 꽃 한 송이 따서 온 가을, 

불빛이 꺼져 있는 창가에 서서 당신을 들여다보았다. -허수경-





더위에 지쳐, 파처럼 축 처진 몸을 한 채, 마당에 차를 세워놓고 어둔 계단을 향해 올라갈 때면 두려웠다. 이 격랑의 여름이 불현듯 야듀를 고할 것만 같은 예감이 아쉬움의 꼬리를 잡고 있는 꼴처럼 조마조마하다. 오고야 말 것은 와야 하는 게 자연의 섭리인데, 이 지겨운 더위를 어찌 보내나 혼자 끙끙대는 내가 가소로웠다. 여름은 보내줘야 하지만, 다가올 가을이 두려웠다. 집에선 선풍기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나는 여름을 찜통 안의 옥수수처럼 보내는 중이었다. 물론 사무실에선 종일 에어컨을 가동했다. 찬바람을 방어하는 게 싫어 집에선 부채마저 거부했던 나는 여름이 늘 아득했다. 나는 냉체질이라 우선 선풍기 바람을 쐬면 손과 발이 시리다. 여름이 늘상 고역이다. 여름마다 몸에 열이 나라고 한약을 먹었다. 한약의 기운은 신묘했지만, 열은 늘 하강을 하지 않고 상승만 했다. 얼굴과 머리로 뻗치는 열 때문에 여름이면 화병이 걸린 것처럼 정신을 못 차렸다. 머리카락은 가뭄을 타는 벼처럼 부석거리며 뿌리채 뽑혀 흩어졌다.


그래도.. 열기 후끈한 마당에 발을 딛는 퇴근 때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 바람 속 어딘가에 서늘한 한 줄기 바람이 섞여, 서늘함 속에서 하마 들려올지도 모를 귀뚜라미 소리 때문이었다. 징글징글해도 좋다, 조금만 더 머물러 다오. 더위야! 이런 마음이었다. 다가올 가을이 두려웠다. 





정확히, 8월 2일로 넘어선 2시 몇 분. 깊은 밤에 잠이 깼다. 열어놓은 창문으론 어느틈에 새얼굴로 단장한 바람이 청신하게 뻗어오고 있었다. 아!!! 나는 어둠 속에서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있음을 느꼈다. 결 고운 바람결에 힘없는 귀뚜라미 울음이 따라 들어왔다. 올 것이 오고 있었다. 귀뚜라미 소리는 단촐했고, 부추기는 주변 소리 없이 단조의 음을 짚고 있었다. 차라리 환청이길 바랐으나, 창을 통해 걸러진 바람이 가볍고 다정했다. 시절이 변하고 있다는 징조였다. 징조는 인간의 꿈 뒤에서 오만 모략을 꾸미고 있다가 이렇게 가장 해이한 틈에다 일격을 가한다. 한 치의 오차가 없는 그들의 모사가 시절을 이끌고 변화를 도모한다. 오지마, 오지마, 되지않게 바라던 내 소극적 염원이, 보기 좋게 넉다운 패를 당했다. 질 수 밖에 없는 게임이었지 않은가!


여름 아침 창가에선 참새의 노랫소리가 떼쓰는 어린아이들처럼 요란스러웠다. 햇살이 아직은 부드러운 여름 아침의 창가는 뭔지 모를 부산함으로 들떠있어서 마음이 바빴다. 참새떼의 발랄한 지저귐은, ‘기체후일향만강’을 묻는 안부쯤으로 생각해도 부족할 게 없어 밤새 굳은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이상했다. 귀뚜라미 소리를 들은 그날 아침은 창가가 고요했다. 이상하다. 다음날 아침도 멀리서 희미한 ‘짹짹짹, 찌찌찍’ 소리만 들릴 뿐 우리 창가는 텅 비어 있었다. 3일 째 되는 날 한 두 마리 참새가 특유의 발랄한 지저귐을 주고받으며 머물다 갈 뿐이었다.


이 의문으로 나는 며칠 혼자 고심하고 있다. 이 녀석들과 귀뚜라미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귀뚜라미가 운다는 것은 가을이 온다는 기별이고, 그렇다면 들판의 곡식이 여물어간다는 뜻일테고, 참새들은 이제 민가가 아닌 들판으로 먹이를 찾으러 가는 걸까? 아직 알곡이 꼭 차지는 않았을 텐데. 벼도 여물려면 멀었는데!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벌판의 잡초 씨앗이 영글었나?


그리고 열흘이 지났다. 귀뚜라미는 마당에서, 들판에서, 이제 떼로 운다. 우는 소리도 제각각이다. 몸을 이용해  공명으로 소리를 내서 짝을 부르는 소리는 다른 풀벌레 소리와 함께 가을 밤을 빈혈로 어찔하게 한다. 가끔 땅 쏙의 지렁이까지 합세한다. 지렁이도 운다는 말이다.


해마다, 계절마다, 헤어지는 연습을 해야하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그러나 이별 앞에서 앓음의 편차가 많은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이어지는 때다. 안개가 밀려오듯 죽음의 발걸음도 이렇게 오고 있겠지. 살금살금. 고양이 처럼 우아하게 또는 기품있게.기어이 가을이 오는 것처럼.




내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는 무슨 꽃을 길러냈을까? 그대에게 따 줄 꽃이 있기나 할까. 불빛이 꺼진 창가에 서서 나를 들여다보아야 할 가을이 코 앞이다. ‘구월의 노래’가 들리면 방랑의 길을 서두는  시간의 꼬리가 순해진다. 체념을 배워야 할 시간이라고 귀뚜라미는 밤새 울어댄다.참새는 인간의 그늘을 벗어나 들판을 활보할 것이다. 돌아갈 집이 없어도 그들의 지저귐은 하늘을 덮는다. 그리고 오늘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물며 벌판이 텅비어질 겨울을 고민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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