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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y Oct 13. 2019

내 소임을 반(半)하다

D+76

두 달 반 만에 산에 올랐다. 북한산 문수봉. 집 가까이 뒷산(용마산)과 앞산 (관악산)은 수시로 다녔지만 정상 등반을 목표로 산에 다녀온 건 곰배령이 마지막이었으니 꽤 오랜만의 산행이다. 지난 두 달 반 동안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 4마리를 건강하게 잘 보살피느라 여름휴가도 포기했고 강아지들 데리고 1박 2일의  짧은 여행을 괴산으로 다녀온 게 다였다.


며칠 전, 일본 오사카에 있는 형을 방문한 둘째 아들 그리고 미국으로 입양 간 첫째 강아지 Boo를 보내고  오래간만에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물론 아직 별 달 꿈공 네 마리가 함께 있긴 하지만 식구가 반으로 준만큼 한적하기 그지없다. 다행히 미국으로 간 부는 CoCo라는 이름을 부여받아 넓은 잔디밭을 콩콩콩 뛰어다니며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잘 지내고 있다. 인천공항 화물청사에서 케이지에 실어 보내는 마음은 너무 아팠지만 장거리 비행을 잘 버티고 미국 시애틀에 도착해 밥 잘 먹고 잘 자고 응가도 잘했다니 얼나 마음이 놓였는지... 좋은 환경에서 사랑받으며 평생 행복하게 살 너의 운명에 감사한다.


케이지에 실려 미국으로 간 Boo
새이름 Coco& 새주인 Caroline @ Seattle


일본에 간 둘째 아들도 혼자서 비행기 타고 오사카에 잘 도착해 형과 오사카성, 사슴공원, 레고랜드, 온천, 동물원, 유니버설 스튜디오까지 알차게 돌아다니며 신나게 놀고 있다 하니 엄마는 이제 소임을 다는 아녀도 반은 한 것 같다. 두 아들 잘 키워 스스로 여행할 나이가 되었고 강아지 두 마리 잘 보살펴 좋은 곳으로 입양시켰으니 말이야...


오사카에 도착해 나라사슴공원 투어중인 둘째


그렇게 보내들 놓고 혼자 가뿐한 마음으로 산에 올랐다. 발걸음도 얼마나 가벼운지 두 시간 만에 문수봉 정상에 올랐다. 서울 근교에 이토록 아름다운 경관의 산이 있다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구기탐방센터에서 시작해 문수사 대남문 문수봉 승가봉 사모바위 비봉 진관사까지 약 5시간이 걸렸다. 태풍 히비기스때문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 정상에서 좀 무섭긴 했지만 정말 시원하고 쾌청한 가을 하늘에 마음이 펑 뚫리는 것 같았다. 역시 산은 산이다. 언제나 늘 한결같이 좋다.


북한산 문수봉 정상에서
은평 한옥마을 '셋이서 문학관'


힘겹게 바위를 타고 진관사로 내려오니 마침 국행 수륙재가 한참이다. 몸도 지치고 땀도 많이 흘려 수륙재 참관은 패스하고 '셋이서 문학관'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이외수, 천상병, 중광스님 세분의 작품이 한옥집 방 하나씩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중 이외수 님의 "가끔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의 나무를 보라

바람 부는 날에는

바람 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


꽃 피는 날이 있다면

어찌 꽃 지는 날이 없으랴


온 세상을 뒤집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밤에도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지더라


더러는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와

일기장 갈피마다

눈이 내리고

참담한 사랑마저 소식이 두절되더라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침묵으로

세월의 깊은 강을 건너가는

한 그루의 나무를 보라


이렇게 시를 읽다 보면 흔들리던 마음이 차분해진다. 산에 올라 내 발아래 펼쳐지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한그루의 나무를 보며 흔들리던 마음이 저절로 평화로워진다.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진다? 내 소망은 하늘로 뻗어 제주도에 있는 둥에게로, 일본에 있는 두 아들에게로, 더 멀리  미국에 있는 CoCo에게로 간다. 부디 모두 행복하길... 소임을 반쯤한 나도 세월의 깊은 강을 건너 꽃지는 날이 오겠지만 그때는 부디 모든 소임을 다했기를 빌어본다 북한산을 다녀온 밤에 호젓하게 맥주 한잔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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