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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y Jun 30. 2018

희귀언어의 마지막 사용자라면

김영하 소설 오직두사람을 읽고

김영하 작가, 솔직히 책이 아니라 TV에서 처음 접했다. 조금 고지식하고 답답하게(?) 생기신 외모와 달리 소탈한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었는데 책으로 처음 접해보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뭐랄까? ‘살인자의 기억 법’이라는 책도 읽어 봐야겠다는 호기 발동한달까? 얼굴하고 글하고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심지어 오직 두 사람은 “ 보고 싶은 언니에게”라는 편지 형식으로 일인칭 여자가 쓰는 내용이다. 작가는 남자 그것도 대한민국 아저씨인데.. 독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투까지 언니에게 여자 동생들이 흔히 쓰는 어여쁜 구어체다.  


어제는 재미있는 기사를 하나 읽었어요. 한번 상상해보세요. 언니는 희귀 언어를 사용하는 중앙아시아 산악지대의 소수민족 출신으로 스탈린 치하를 피해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난 수십 명 중 하나예요. 뉴욕에서 이 언어를 쓰는 사람은 언니네가 전부예요. 고향에서는 러시아어가 표준어가 되었고 언니네 언어는 이미 소멸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와요…. 마침내 오직 언니하고 다른 한 명만 남아요. 둘은 어쩌면 전 세계에서 이 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 들일지도 몰라요. 그러던 어느 날 이 둘, 최후의 두 사람이 말다툼 끝에 의절을 해요. 그러곤 수십 년 동안 대화를 나누지 않아요. 결국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요. 저는 생각했어요.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의 고독에 대해서요


흠.. 희귀 언어를 쓰는 유일한 두 사람 중 한 명이 죽었다? 모국어로 대화할 사람이 없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사실 나는 혼자 중국에 출장을 갔을 때 영어라곤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얼음물 한 컵 먹고 싶어서 “빙. 수. 빙. 수. ”를 수도 없이 외쳤던 기억도 있지만 삼일만 아무 말 안 해도 세상에 나만 혼자 외톨이가 된 기분을 느꼈다. 지구 상에 나만 홀로 한글이라는 희귀 언어를 쓰는 듯한 느낌을 꽤나 자주 느껴본 지라 만일 나와 유일하게 한국말로 대화하던 사람과 단둘이 북극에 살다가 그 사람이 죽었다면 나라면 물개라도 붙잡고 말을 할 것 같다. “ 밥은 먹었어? 춥지 않아? 살만해? 나는 죽겠어.” 뭐 이런 식이겠지. 북극까지 안 가고 얼마 전 tvN 프로그램 “숲 속의 작은 집”처럼 자발적 고립 다큐멘터리를 한 달만 찍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며 나를 고독에 방치하지 않으려 안달이 나지 않을까?  


아무튼 글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현주는 어려서부터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한 죄로 이혼한 엄마와 여동생이 미국으로 떠나고 오빠도 거제도 조선소에서 일하는 바람에 갑자기 쓰러져 대수술을 마친 아빠를 혼자 돌보게 된다. 대학 교수까지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잘 나가던 아빠가 병원신세를 지게 되고 여주인공은 학원 강사 일을 하며 연애에 매번 실패하고 나이 마흔을 넘기니 허무함을 숨기지 못한다.   


내 인생은 뭐가 남았지? 아빠와의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빠를 기쁘게 해주려 공부해서 아빠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해 아빠가 권해준 전공을 선택했고 주말마다 시간을 같이 보냈어요. 보란 듯이 예술사를 전공하는 학자가 되지 못해 늘 미안했고 아빠가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한 직업을 갖지 못해 언제나 부끄러웠어요. 아빠는 사귀던 여자들에게 큰 딸이 곧 박사학위를 딸 것이고 그럼 곧 예술사 교수가 될 거라고 그것도 모교의 교수가 될 거라고 말하곤 했거든요. 터무니없는 소리죠. 요즘 같은 시절에 국내에서 예술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딴다 해도 갈 자리가 없었고 설령 갈 자리가 생긴다 해도 그때까지 먹고 살길이 막막하잖아요? 학원 강사는 저로서는 나름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아빠는 결코 인정해 주지 않았어요.


사실 주변에 이런 사람 많지 않은가?  잘 나가는 부모 밑에서 의사, 변호사, 검사, 교수를 해야 부모 낯 부끄럽지 않게 떳떳하게 살 수 있는 환경에서 그러지 못했다든지 어려운 환경에서 부모님 뒷바라지를 받아 공부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해 부끄럽다든지 하는 식의 일 말이다. 어떤 부모든 자기 자식은 남달라 보이고 성공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변변한 직업이 없어서 결혼을 못해서 이혼을 해서 아이가 없어서 등등 많은 이유로 불효자가 되고 부모를 실망시키는 자식이 돼 버린다. 하지만 결국 부모님이 병들고 아파 누워 있을 때 그 옆에 남아 있는 건 성공한 자식이 아니라 사랑받고 자란 자식 아닐까? 물론 사랑도 못 받고 돈도 못 받았는데도 부모를 책임져야 한다면 억울하긴 하겠지만 영원한 책임도 없으니 결국 모든 인간이 각자의 인생을 살수 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주인공이 갑상선 암에 걸렸을 때 아버지라는 사람이 병원에 한 번밖에 안 왔다는 사실에 화가 나 미국에서 동생과 엄마와 시간을 보내다가 갑작스레 아빠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온 현주는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 저 낯선 몸뚱어리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허망한 존재에게 인생이 바쳐졌구나 싶어요. 저는 저 사람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바이털 사인이 꺼지고 더 이상 저 육체로부터 아무 반응도 받아오지 못한다면 즉 아빠가 마침내 의학적으로 사망한다면 한동안은 좀 막막할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자주 생각하게 돼요. 뉴욕에 있었다던 그 두 사람, 오직 두 사람만이 느꼈을 어둠에 대해서요.


세상에 희귀 언어를 쓰는 마지막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죽는 순간이라면 어떤 마음일까? 어차피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니 그저 조금 더 고독해지긴 하겠지만 사실 둘이 있다고 해서 고독하지 않은 건 아니지 않은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백 명이면 뭐하고 천만 명이면 뭐하나? 그래도 나는 나로서 혼자이고 고독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를까? 결국 혼자 남게 된 현주의 말처럼 산사람은 살게 돼 있다.


장례를 마치고 오랜만에 노트북을 켜니 언니에게 쓰다 만 메일이 뜨더군요. 불과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지는 거 있죠… 언니 전 이제 괜찮아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도 알아요.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삶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요. 그런데 그게 막 그렇게 두렵지는 않아요. 그냥 좀 허전하고 쓸쓸할 것 같은 예감이에요. 희귀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가 된 탓이겠죠.  

 

희귀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로 우리 모두 살고 있는 것 같다. 허전하고 쓸쓸하게… 아빠와 단둘이 사 사람, 엄마와 단둘이 사는 사람, 형제, 자매, 부부 누구든 둘이 사는 동안 오직 두사람이 서로에게 의지를 하게된다.  하지만 결국 인생은 혼자 가야 하는 길이니 이 숙명을 받아 들여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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