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그다지 많이 한 편은 아니다. 독일에 오래 머물러 있었지만 그때는 여유 없는 유학생 신분이라 여기 저기 다닐 형편이 못되었다. 그래도 오스트리아 빈에 유학 중인 친구가 있어 가볼 기회가 있었다. 독일의 작은 대학도시와는 비교가 안되게 크고 화려하고 볼만한 건축물도 많았다. 빈에서 좀 떨어진 쇤브룬 궁전에도 가보았다. 베르사유 궁전을 모델로 지었다고 알려진 궁전인데 아주 넓게 펼쳐진 정원으로 유명하다. 영국의 코티지 정원처럼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정원이 아니라 기하학적으로 꾸며졌다. 수평으로 넓게 펼쳐진 정원 한 가운데에 아름다운 분수도 있고, 정원이 끝나는 저 먼 곳 언덕 위에 조망으로 유명한 '글로리에테'라는 건축물도 있다. 쇤브룬 궁전은 아름다운 곳이고 가볼만한 곳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때 찍은 색바랜 사진들 틈에는 그때 떠오른 한 조각 생각도 끼어 있다. 동경의 빛이 더는 내리비추지 않아 세상이 모두 퇴색해버리면 남는 세상은 얼마나 허무한 세상인가하는 생각이었다. 세상이 갑자기 쪼그라드는 느낌이기도 했다. 좀 형언하기 어려운 느낌이라 벤야민이 먼 곳의 풍경에 대해 한 말을 끌어와 생각의 실타래를 아주 약간만 풀려고 한다.
"어떤 마을이나 도시를 처음 볼 때 그 모습이 형언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하기 불가능한 이유는, 그 풍경 속에 멂과 가까움이 아주 희안하게 결합하여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일단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시작하면 그 풍경이 일순간 증발해버린다. 마치 어떤 집 안에 들어서면 그 집 전면의 모습이 사라지듯이...우리가 방향을 분간할 정도가 되면 그 최초의 이미지는 다시는 재생할 수 없게 된다."
처음 접한 풍경은 아우라를 지닌 풍경이다. 모든 먼 곳이 가까운 곳이 된다고 해서 다 아우라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가까이 다가간 풍경은 아우라를 잃어버리기 쉽다. 가까이서 느끼는 구체적인 인상들로 풍경이 속속들이 채워지고 어렴풋한 먼 곳에만 내리비치는 동경의 빛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풍경에 익숙해지면 사라지는 풍경의 아우라를 여행지에서 잃어버린 '유실물'로 떠올리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글의 제목이 〈유실물 보관소〉이다. 벤야민은 풍경의 아우라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슬퍼한 것은 아니다. 꼼꼼하게 살펴보는 습관을 통해 풍경이 차라리 '무거워지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나중에 매체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실물이 아까운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