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에 대해 나와 가장 다르게 생각한 사람이 그이다. 어려운 시절을 넘어넘어 고난을 뛰어넘으며 그가 점점 삶의 사람이 되었다면 그의 첫 자식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다가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곤 했다. 삶에 의미가 없으니 당연 그 삶의 끝도 의미가 없는 것이고 때문에 오히려 그 끝에 대한 두려움을 이리 뒤집고 저리 제쳐 봐도 갖고 있지 않기도 하다.
삶이 신비롭고 생이 좋았던 그는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려했다. 꺼려했기 때문에 더 길게 대화를 나눌 수 없었고 그래서 늘 짐작만 하게 된다. 생과 사에 대해 그와 내가 가진 느낌과 생각이 그렇게나 달랐던 이유에 대해서.
그가 떠나고 지나간 두 번의 추석 무렵은 늘 그 시기에 있었던 일과, 그 시기 이후 터무니없이 갑작스레 만나게 된 그의 죽음을 소화하는 과정에 대한 느낌들이 기억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언제나처럼 집에서 시부모와 차례를 지내고 친정으로 가서 온가족이 모여 늘 보내던 대로 지나간 그 시간이 다시는 '언제나처럼'이 되지 않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때.
유행성출혈열, 대상포진, 구안와사, 시골 살게 되니 엄마가 별 증상을 다 겪는구나 하면서도 그걸 다 이겨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무척이나 삶 쪽의 사람이어서 그 생이 그리 끝나리라고는 더더욱 생각지도 못했던 때.
그리 아픈 동안 그는 자기 삶의 마지막에 대해 떠올리곤 했을까?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는 사는 쪽에 서있었는데.
내 아이와의 관계를 연결시키지 않는 한에서, 종종 삶은, 더 살고자 하는 이에게 더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바꿔줄 수 있는 거라면 그의 생과 내 생을 바꿀 수도 있는데, 생각하곤 한다. 내 생의 끝보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이 삶에서는 더 큰 일이어서, 나를 잃은 후 딸의 마음이 짚어지면 멈칫하게 되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