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보고 누군가 눈 위를 걸어갔음을 알거나, 굴뚝에 피어오른 연기를 보고 누군가 불을 피우고 있음을 아는 것처럼, 물리적인 흔적으로 다른 것과 의미가 연결되는 것을 지표 성이라고 합니다. 어두운 상자(카메라) 속에 들어온 빛으로 사물의 모습을 재현하는 사진은 지표 성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사진의 이러한 특성은 그림 등 다른 시각 매체와 차별성을 낳습니다. 과거의 모습을 재현한 경우 사진과 그림의 차이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수형기록표를 만들었는데, 그 위에 정면과 측면에서 찍은 사진을 붙여놓았습니다. 만약 유관순 열사가 투옥되었을 때 사진 대신 그림으로 그렸다면, 유관순 열사의 생생한 모습을 우리는 대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진이 촬영 대상의 외관을 빛의 흔적으로 고스란히 찍어내는 반면, 그림은 화가의 손길을 거치기 때문에 스타일이 반영되고 왜곡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진과 그림이 이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림을 그리듯 사진을 찍습니다. 취재현장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고 알려진 사진기자들조차, 신문에 사용할 적당한 장면을 만나면 '그림이 된다'라고 표현합니다. 사진기자들의 이 말에는 촬영자의 개입 없이 있는 그대로 찍기보다는, 그림 같은(포토제닉 한) 사진을 만들겠다는 태도가 엿보입니다. 사진기자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현실의 수많은 모습 중에서 그것을 대표할 그림 같은 장면을 골라 사진을 찍습니다. 수많은 것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어도, 사진 찍을 만하다고 알려진 것 이외에는 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진 찍기는 세상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망을 대리하는 행위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된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세상을 그림처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계속 변화하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외면한 채,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은 정지된 고체상태들이 펼쳐진 곳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처럼 현실의 모습을 진짜의 복사물들로 생각하고, 사진 찍기를 통해 진짜의 흔적을 찾고 붙잡으려는 것입니다. 둘째, 눈으로 보는 것과 카메라로 보는 것의 차이를 구분하기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은 보고 싶은 것과 볼 수 있는 것을 보지만, 카메라는 촬영자가 주목하지 못한 것까지 담습니다. 사진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 항상 담기기 마련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릴 때처럼 도화지 속에 넣고 싶은 것만을 선별해서 담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갑니다. 하지만 밖에 나가서조차 카메라라는 인위적인 방에 들어가, 벽면(액정화면)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그림처럼 바라봅니다. 그러나 사진 찍기는 인간적인 보는 방식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우리에게 열어줄 수 있습니다. 사진 찍기의 진정한 힘과 매력은, 그림처럼 바라볼 때 예상할 수 없었던 장면을 우연히 맞닥뜨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입니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과 굴뚝의 연기가 그것을 일으킨 사람의 행위를 추측할 수 있게 하듯이, 사진은 일상에서 항상 옆에 있었지만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 무엇인지, 세상을 특정한 그림으로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어떠한지를 흔적으로 남겨 우리에게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