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의 시작
은사님께서 초대해 주셔서 함께 하게 된 마음공부 모임은 매주 한 번씩 줌으로 모여서 마음공부를 위한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었다.
당시 나는 극도로 우울하고 절망 가득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내 아이가 발달장애라니?
왜 나에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왜 내 육아는 이렇게 힘든 거냐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 현실에 낙담했다.
남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다 하는 걸 아무리 가르쳐주도 못하는 아이를 보면서,
심지어 엄청난 노력으로 겨우 조금씩 하게 만들었는데 며칠 지나면 다시 까먹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상황 앞에서 나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밤에 잠들 때마다 나는 울며 기도했다.
제발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이 현실은 진짜가 아닐 거라고.
이 꿈에서 깨면 제발 스텔라가 정상발달하며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그렇게 세상을 비관하는 절망 가득한 마음으로 마음공부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마음공부 모임에서 가장 먼저 읽었던 책이 바로 개리 레너드의 <우주가 사라지다>였다.
이 책은 마음공부의 끝판왕 격인 헬렌 슈크만의 <기적수업>을 이해하기 위한 해설서로 인식된다.
그래서 부제도 '<기적수업>을 통해 배우는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종교에 관한 책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의 외형적 굴레를 벗어나 삶의 본질과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말해주는 책이다. 이런 내용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저자인 개리가 어느 날 밤 갑자기 불쑥 나타난 아턴과 퍼사라는 스승과 나누는 대화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이 아턴과 퍼사는 실제 사람이 아니라 육신을 빌어 현현한 영혼과 같은 존재였다. 스스로를 예수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성 도마와 다대오라고 밝히는 그들은 개리에게 여러 가지 삶의 진실을 전해준다.
이런 설정 자체가 처음엔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의심했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어느 순간 마음에 쿵 와닿았다.
그리고 이 책을 계기로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들, 책의 내용들, 그리고 마음공부 모임에서 오랜 시간 마음공부를 해오신 선생님들의 가르침들을 종합해서 내가 깨달은 것들은 절망의 동굴에 갇혀있던 나를 희망의 빛으로 안내해 주는 나침반 같은 역할을 했다.
이 세상은 꿈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현실은 한낱 꿈이다. 여기에서 꿈은 잠잘 때 꾸는 꿈을 말한다.
즉, 잠에서 깨어나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여전히 꿈속에 있다는 뜻이다.
마치 잠잘 때 꾸는 꿈 속에서는 그것이 꿈인지 모르는 것처럼, 이 삶 역시 꿈이지만 나는 이것이 꿈인지 모를 뿐이다. 꿈에서 깨고 나야만 그것이 꿈이었구나 깨달을 수 있듯이, 나의 의식이 깨어나야만 이 삶이 꿈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나는 원래 완벽하고 완전한 존재로서 아무 고통도 없는 천국과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데 잠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이 꿈에서 깨면 내가 천국에서, 집에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게 된다.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걸, 내가 완전한 존재라는 것도 모른 채로 내 몸이 나라고 생각하고, 내 불완전한 에고가 나라고 생각하며 한평생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 시련, 실패, 불행은 내가 꿈에서 깨도록 깨달음을 주기 위해 내가 세팅해 놓은 장치이다. 그런데도 깨닫지 못하면 그 상황이나 대상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지만, 비슷한 패턴으로 불행한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 언제까지? 내가 깨달을 때까지. 이번 생에서 깨닫지 못하면 다음 생에까지 이어서 말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윤회라고 일컫는다.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의 평생소원은 죽어서 화장한 재가 갠지스강에 뿌려지는 것이라고 한다. 죽은 다음 그 재가 갠지스강에 뿌려지면 더 이상 환생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윤회의 고리를 끊는다는 것은 현생에서 카르마를 해소한다는 뜻이고, 그것은 이 생에서 내게 주어진 과제를 해소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생에서 깨달음을 얻어 꿈에서 깨지 못하면 나는 평생, 어쩌면 다음 생에서까지 계속해서 불행한 상황과 고통을 마주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게다. 마치 매트릭스 안에 살면서 그게 진짜 내 삶이고 진짜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빨간약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이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깨닫는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구나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그저 꿈일 뿐이라는 것.
몸을 입고 살아가는 이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 그저 나의 에고, 말하자면 게임 속 아바타일 뿐이라는 것.
'진짜 나'는 천국에서 아무 고통도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지금 이 '가짜 나'는 일종의 체험학습을 하기 위해 아바타를 가지고 꿈이라는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 말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우주가 사라지다>를 읽으면서 불현듯 헤르만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학창 시절에 읽긴 했지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은 채로 책장을 덮었던 그 책.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들춰본 적이 없었던 바로 그 책.
그 2,30년 전에 읽었던 <데미안>의 구절,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라는 문장이 내 뇌리를 번뜩 스쳐 지나간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 그게 이 뜻이었구나!' 하는 깨달음.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내가 바라보는 이 세계는 하나의 알 껍질이다. 이 알을 깨고 나와야, 이게 꿈이라는 걸 깨닫고 내 에고를 깨고 나와야 비로소 진짜 세상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내 아이에 대한 생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텔라는 이미 완전한 존재이다. 부족한 것도, 더 필요한 것도 없다.
단지 스텔라가 부족하다고 바라보는 내 '에고'가 있을 뿐이다.
나는 아이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올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엄마인 내가 먼저 알을 깨고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나비 꿈을 꾸는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된 꿈을 꾸는 것인가
장자의 호접몽 이야기도 떠올랐다.
꿈에서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데 깨어보니 다시 나인 게 아닌가. 그런데 꿈이 너무 생생하여 고찰해 보니 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내가 실은 나비인데 지금 꿈에서 나로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 유명한 이야기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쩌면 정말 꿈일지도 모르겠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게 했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하지만 원래 꿈에서 깨기 전에는 그것이 꿈인지 대개는 알 수 없는 법이다.
꿈을 꾸면서 이것이 꿈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경우를 자각몽이라고 하는데, 마치 이 세상이 꿈이라는 걸 깨달은 상태가 바로 이 자각몽 상태와 유사할 것이다.
자각몽 상태에서는 흔히 내 마음대로 모든 걸 컨트롤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순간이동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현실에서 자각몽 상태에 이른다면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게다. 즉 내 의지대로, 내가 원하는 현실을 창조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SF 공상과학 영화 같은 소리라고?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많은 과학자들은 이 우주가 시뮬레이션이라는 이론을 지지한다. 일론 머스크 역시 이 우주가 시뮬레이션이 아닐 확률은 10억 분의 1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우주가 시뮬레이션 또는 홀로그램이라는 말이나, 이 세상이 꿈이라는 말이나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
지금 내가 나라고 믿는 '나'는 진짜가 아니라는 것. 이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가짜인 것에 목매기보다는 진짜를 찾아 나서는 편이 현명하다.
에고의 존재를 알아차림
그렇게 이 책을 통해 나는 나인줄 알았던 내가, 온갖 부정적 감정에 휩싸여 고통받고 있던 내가 사실은 '가짜'라는 걸 깨달았다. 그 가짜 나인 '에고'는 내가 '진짜 나'로서 존재하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이 우주가, 내가 살아가는 인생이 한낱 꿈이라는 깨달음은 이 꿈에서 깨어야, 알을 깨고 나가야 내 진정한 본성으로서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끌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내 인생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행에 대해서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대처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스텔라가 발달장애를 가지고 나에게 온건 어떤 이유가 있어서일 게다.
내가 꿈에서 깰 수 있도록, 어떤 깨달음을 주기 위함이며 이 역시 내가 그렇게 세팅한 것이다.
내가 깨달음을 얻어 이 꿈에서 깨면 그때 비로소 내가 경험하는 고통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은 오직 두 가지, 두려움과 사랑이다. 에고는 두려움을 먹고 산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두려움 말고 사랑을 선택해야 한다.
이게 바로 <우주가 사라지다>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이다.
'스텔라가 발달장애를 가지고 평생 내가 돌봐줘야 하는 사람으로 크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 말고,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나에게 와서 정말 감사하고 행복하다. 예쁘고 건강하게 독립적인 하나의 인격체로 잘 클 수 있도록 내가 사랑으로 잘 키워야겠다' 라는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간순간 일어나는 나의 생각, 감정들을 알아차려야 하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희노애락을 경험하는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상 감정의 파도가 없을 수는 없다.
설사 부정적인 감정, 두려운 마음이 들었더라도 그 순간, 부정적인 감정과 두려움에 휩싸였던 자기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말고,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걸 알아차린 후 그런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이 알아차림과 용서, 사랑을 선택하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우주가 사라지다>를 읽고 많은 깨달음은 얻은 후 나는 더 이상 울면서 잠들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이 고통스러운 현실이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울부짖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미 이 우주가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나는 내 사랑스러운 딸 스텔라가 나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온 스승이라는 걸 알았다.
꿈에서 깨어 알 밖으로 나가면 완전하고 완벽한 존재로서의 나와 스텔라가 천국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리란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단 한 번도 그 천국을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