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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Sep 24. 2016

성경, 어떻게?

나, 나의 가정 그리고 나의 자녀

이전 글에서, 하나님의 교육방법은 '기억하기'라고 이야기했었다. 유월절과 성찬식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본인이 누구신지, 또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를 주기적으로 기억하길 원하심이었다. 나아가 그 기억하기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민족'의 차원에서 '함께 기억하기'의 차원까지 발전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내'가 기억하는 것 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조금 더 논의를 이어가 성경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쓰여있는 책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기록한 책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으신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통해 어떻게 교육받고, 교육 하기를 원하셨을까?

조병호, "성경통독", 통독원.


레위기를 조병호 목사님의 통성경 분류에 따라 '거룩한 시민학교 교과서'라고 할 때, 나는 성경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교과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럼, 성경을 통해 우리는 교육받고 또 이를 가지고 다른 이들을 교육해야 하는 것인데 도대체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이전 글과 연결시켜보자.


하나님의 교육방법이 '기억하기', 다시 말해 '잊지 않기'라고 했을 때, 성경은 '기억하기'의 방식으로 또 '잊지 않기'의 방식으로 우리를 교육할 수 있다. 매일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책)을 매일 '기억'하는 것이고 나아가 매일 '잊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진짜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은 '살아있는 책'이라고 전제된다는 것이다. 민네이션_"성경과 해석"을 인용해보면, 논의는 더 깊어질 수 있다. 읽는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고, '이해'한다는 것은 '해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해석'이라는 것은 몹시 주관적이어서 필연적으로 다양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70억 인구는 70억가지의 삶을 가지고 있고, 그 삶에 따라서 각각 고유한 해석의 틀을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것은 '해석학'의 문제가 된다. 성경을 고정된 책이라고 보았을 때, 성경은 '내'가 주체가 되어 읽는 '객체'가 된다. 그러나, 성경을 '살아있는 책'으로 보았을 때는 칼 바르트식의 이야기가 가능하다.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내 삶을 읽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냥 계속해서 꾸준히 읽는 것이다. 누군가의 '해석'이 들어간 것을 통해서 읽거나, 누군가에 의해서 정리된 것을 읽는 것은 '살아있는 성경' 그 자체와 만날 수 없다. 그 성경이 내 삶을 읽게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렇게 우리 교회에서는 '1년에 10번 읽거나 듣기'를 강조했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강의와 아무리 좋은 설교를 통해서도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 결국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될 뿐이거나, 지식과 인간의 만남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이 신기하고 재밌는 것은, 성경을 읽는 것으로 '성경'과 나의 만남이 되고 그 만남은 '하나님'과 나의 만남 즉, 교제가 되는 것이다.


하이기쁨교회


성경에서 '주관'을 제하고 성경 그대로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이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이를 가지고 내가 설교자가 되어서 나의 아내 그리고 나의 자녀를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경의 스토리를 이야기하고 그 스토리를 통해서 성경 그 자체를 각각의 지체가 만날 수 있도록 나는 다리를 놓는 것이다. 혹은 같이 성경을 읽고 들음으로써 살아있는 성경이 우리의 삶을 읽어나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서서히 바뀌어간다. 사랑이 채워진다. 사랑 속에 살아간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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