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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테판 Jul 27. 2020

#08 피렌체 - 물들다

이탈리아 여행기 08

극적인 이야기에는 절정의 순간이 있듯 여행을 다녀오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곤 한다. 모든 순간순간이 빛나고 소중하지만 돌아와서도 두고두고 생각나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 순간을 여행이라는 이야기의 클라이맥스(climax)라 생각한다. 두오모 쿠폴라에서 바라본 황금빛 물결이 흐르는 피렌체의 감동은 두고두고 생각이 나는 순간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소박한 규모 덕분에 여유롭게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기차역은 숙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두오모 성당도 숙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피렌체 역사지구를 얼마든지 다닐 수 있다. 피렌체에 머무는 단 며칠이었지만 지도 없이도 다닐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정이 들었다.



화려한 대리석 장식에 붉은색과 녹색의 조화가 아름답다. 마치 푸른 하늘에 핀 한 떨기의 꽃 같다. 왜 플로렌스라 부르는지 느낄 수 있다. 건물 하나하나가 꽃이며, 도시 전체가 르네상스의 화려함을 자랑하듯 피어난 꽃이었다. 피렌체는 세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피어나고 있는 꽃이다.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오랜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분위기를 간직하고 싶었다.



피렌체에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좁고 긴 쿠폴라의 계단을 오를 수 있을까였다. 나는 폐소 공포증이 있기 때문에 천장이 낮고, 어둡거나 좁은 곳에서 오랜 시간 버텨내지 못한다. MRI와 같이 좁은 곳에 들어가야 하는 검사를 하다 애를 먹은 적이 있고, 훈련 중 방독면을 쓰다 호흡곤란을 겪은 적이 있다. 그래서 쿠폴라 계단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나를 상담해 주었던 군의관이 말했다.

"심리적인 것입니다. 방독면을 쓰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세요?"

"옷장에 갇히는 생각이 들어요. 숨을 쉬지 못하겠어요."

"심호흡을 하고, 평소에 방독면을 착용하는 연습을 해보세요."



몇 년 전이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데 주인공이 무너진 건물에 갇히고 말았다. 너무 놀라 숨이 가빠졌다. 주인공에게 이입한 것처럼 숨을 가쁘게 쉬기 시작했고, 초조함과 떨림으로 어쩔 줄 몰랐다. 그때 심리적인 것이라는 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심호흡을 했다.

스으읍-... 후-


그리고 이제 쿠폴라 계단과 마주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흐으읍-... 후-



생각보다 넓었다. 조금 안심하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3층 정도의 계단을 올랐을까. 조금씩 숨이 차오르는 걸 느끼고, 실제 계단도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약간 두려워질 때쯤 중간중간 조금 트인 공간이 있었다. 심지어 작은 창이 있어 마음의 숨을 쉴 수 있었다. 뒷사람의 행렬이 조금 떨어져 있을 땐, 태연한 척 작은 창을 통해 붉게 빛나고 있는 피렌체를 감상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괜찮네."



맞닥뜨리니 이겨내야 했다. 계단이 좁아지고 불안할 때면 땅을 보았다. 좁고 긴 계단을 상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창이 나오면 다시 도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보통은 체력이 관건인 것 같다. 계단을 계속해서 오를수록 사람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함께 올라가던 누나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중 혼자 온 듯한 한국인 여성 한 분이 함께 숨을 헐떡이며 간간히 우리에게 친근한 미소를 건넸다. 그리고 힘듦을 공감하는 눈빛과 미소만으로 유대감을 만들어냈다.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지만 꽤 오랫동안 함께 계단을 올랐다.


길이 워낙 좁다 보니 내려오는 사람을 보내고서야 오를 수 있다. 피렌체의 멋진 두오모에 오른 사람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나는 그들과 가벼운 눈인사를 하며 바통을 넘겨받았다.



꽤 올랐을까. 계단 오르기가 몸에 배어들 때쯤 드디어 끝이 보인다. 좁은 계단 오르기가 끝이 나고, 낮은 천장이 나타나자 드디어 저 멀리 빛이 크게 들어왔다. 몸을 숙인 채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답답했던 사방이 터지고, 높푸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맞이해 주었다.


계단을 다 오르고 나서 처음 보는 피렌체의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고생 후에 마시는 맥주가 꿀 맛이듯 땀을 흘려 맞이한 멋진 풍경은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장면을 선사했다. 깊은 곳에 숨어있던 블랙홀 같은 두려움을 극복했다는 것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영문 이름으로는 플로렌스, 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름에 걸맞게 피렌체는 붉은색의 지붕들이 지는 태양의 황금빛 물결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건물들과 인간은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 저 안에서 얽히고설킨 복잡한 관계들 마저 아무렇지 않게 보인다. 내가 살아오면서 걱정하고 염려했던 모든 문제들이 더 이상 문젯거리가 되지 않은 순간이었다. 수많은 점들 사이에서 선으로 연결된 세상, 그 안에서 은은하게 빛을 내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다.


로마가 로맨틱 코미디라면, 피렌체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드라마의 분위기가 난다. <냉정과 열정사이>는 피렌체가 주연이다.



피렌체에 있으면 예술적 영감이 저절로 떠오를 것이다. 붉은 장미처럼 피어오른 지붕들과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의 그림과 장식을 매일 마주하고, 아르노 강을 따라 긴 세월의 아픔을 간직한 다리를 건너며 옛이야기를 떠올릴 수도 있다. 골목골목 보이는 두오모와 숨바꼭질하고, 어느 카페테리아에 앉아 황금빛 노을을 바라보며 몇 글자 적고 싶다. 거기에 달달한 크루아상과 쌉쌀한 에스프레소 한잔이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많은 사람들이 피렌체를 사진에 담으려고 난리였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추억을 간직하려고 했다. 그 사람들 사이로 함께 계단을 힘겹게 올랐던 한국인 여성과 마주쳤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미소만 건넸던 그녀가 쿠폴라 정상에서 말을 걸었다.


"같이 사진 찍어 드릴게요."

"저흰 괜찮아요."

"제가 사진 찍어 드릴까요?"

"호호호 감사해요."


그녀는 마치 기다렸단 듯 대답했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 남이 찍어주는 사진은 얼마나 소중한가. 존재만으로도 감동적인 황금빛의 피렌체와 함께 영원히 간직될 추억 속에 정성껏 담아 주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 피렌체 사진을 곱씹을 때, 내 존재를 기억이나 할까 궁금해졌다.

 


은은하게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쿠폴라 계단의 작은 창 사이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두오모 성당 곳곳에는 피렌체의 따스하고 찬란한 태양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나에게도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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