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수 한 방울을 위해 꽃씨부터 뿌리는 브랜드, 아모레퍼시픽
서울로 여행을 온 외국인부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지역, 북촌. 메인 길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조그만 입구를 품은 단독주택이 나타난다. 이곳은 과거 한 의사가 살던 북촌의 어느 단독주택. 지금은 아모레퍼시픽이 사들여서 <뷰티 과학자의 집> 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단 30분이었다. 그러나 전시를 보기 전과 후, 내 머릿속의 '아모레퍼시픽'은 완전히 새로운 브랜드로 다시 태어나 있었다. 기업이 가야 할 길을 보여준 품격이자,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직장인들에게 바치는 찬사와도 같았던 전시를 떠올려본다.
전시관에 입장을 하니 벽면에 '콩'으로 가득 찬 비커가 보인다. 그곳에 붙여진 하나의 메모.
콩은 어떻게 건강을 가져오는가?
*한국 콩 품종
휘갈겨 쓴 듯한 손글씨 쪽지 한 장. 이것은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 하나의 힌트가 된다. 쪽지를 쓴 주인공은, 가상의 연구원이자 뷰티 과학자. 이 집 곳곳에는 그의 생각과 고민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건강과 아름다움을 찾아 70년 연구를 이어온 한 뷰티과학자의 자취를 좇아가보자.
하나,
진짜 연구원의 진짜 기록을 만나다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손으로 쓴 듯한 판서가 남겨져 있다. 아모레퍼시픽의 연구원이 출근을 해서 매일매일 직접 쓰고 그린 칠판이다.
자, 2024년의 서울은 팝업공화국이다. '성수동' 한 곳에서만 하루에도 수십 개의 팝업이 뜨고 진다. 나도 친구들과 함께, 혹은 혼자서도 자주 팝업을 찾는다. 무수히 많은 팝업스토어를 경험해 보면서, 내가 만난 직원의 8할은... 알바생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여기 계신 분들도 아르바이트일 거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가운 입고, 적당히 컨셉을 맞추기 위해서 앉아있는 사람들이겠거니 예상했다.
그러나 내 믿음은 산산조각 깨졌다. '과학자의 집'에서는 실제 아모레퍼시픽에서 근무하는 진짜 연구원이 직접 앉아서 고객을 일일이 응대한다. (!) 그중 한 분과 이야기를 짧게나마 나눠보았다. 확실히 달랐다. 응대가 조금은 서툴러도 아주 친절하고 진솔하게 말씀을 해주시는데, 그동안의 다른 팝업이나 전시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깊이가 다른 진정성이 느껴졌다. (실제로 이 공간에서 화장품 연구에 대한 질문이나, 궁금증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도 이뤄지고 있었다.)
심지어 연구소에서 사람만 데려온 게 아니다. 진짜 연구원들이 실제로 쓰던 연구일지, 용품, 용액.. 모두 함께 파견을 나와 있었다. 연식이 느껴지는 누리끼리한 장비와 약품통, 이니셜이 새겨진 절굿공이에서 느껴졌다. 이건 "찐이다"
과거 음료 전문 미디어에서 에디터로 일할 때다. L사 중앙연구소에 직접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음료를 연구하는 곳이라 그랬을까. 액체로 된 용액과 향료가 담긴 수백 개의 통, 0.0001mg까지 측정하는 초미세 스포이트 등 전문 장비가 놓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단박에 눈치를 챘다. 호일로 덮인 비커, 누런 전문장비.. 정말 아모레퍼시픽 연구소에서 실제 쓰는 물건 고대로 가져왔구나!
그동안 '연구소 컨셉'. '연구원 컨셉' 팝업이나 전시가 얼마나 많았던가. '뷰티과학자의 집'처럼 진짜만 가져다 둔 전시를 보니까 심장이 웅장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맞아, 이런 게 진정성이지!
둘,
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연구
70년의 여정
자그마치 70년. '아모레퍼시픽'이라는 기업이 한국의 뷰티, 한국인의 아름다움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해 온 기간이다. 수많은 석박사 출신 연구원들이 이 자리에서 아름다움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하루하루를 써 내려갔다. 그 하루의 흔적을 만지고 들춰보며 따라가 본다.
이곳에는 더 나은 파운데이션 쿠션의 발림성을 위해, 각종 쿠션에 들어가는 스펀지(담지체)를 하나하나 뜯어서 연구하는 연구원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는 서울을 대표하는 립스틱의 컬러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십 개가 넘는 빨간색을 미세하게 조정해서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헤라의 '서울레드'. 가장 서울스러운 레드, 서울을 대표하는 립스틱이 탄생했다.
재밌는 사실 하나는 "밤에는 립(lip) 조색을 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그 이유는? 실내광과 자연광에 영향을 받아 시간대별로 미묘하게 색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무자의 디테일, 숨은 노하우를 발견하는 재미가 곳곳에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연구원들이 아름다움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며 아름다움에 있어 한 걸음 더 진보를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더라.
전시된 연구일지에 이런 표현이 있었다. "피부톤 연구는, 글로벌 고객의 지역과 문화적 배경까지 고려한 종합적인 감성 연구다. 사람의 피부색은 문화적 요소를 고려한 피부톤의 개념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들이 연구하는 건 단순히 파운데이션 컬러 21호, 23호가 아니었다. 그들은 지역과 사람들의 문화적인 요소까지 총체적으로 고려해서, 한 사람의 아름다움을 종합적으로 돕는 셈이다.
연구원들이 남겨둔 70년간 노력의 흔적. 평범한 직장인들의 하루하루 연구일지가 쌓여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넘어 글로벌 여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고 있었다. 그렇게 세상은 바뀌고 있었다. 더 나은 쪽으로.
녹차와 동백꽃처럼 한국의 재료에서 시작한 아모레퍼시픽의 연구는 이제 레티놀, 히알루론산 등 다양한 화학 성분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우리는 돈을 주고 화장품을 사고, 기업은 그 돈으로 인류의 아름다움을 향하여 더 나은 미래에 투자한다. 그것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혜택으로 돌아오는 구조다. 나는 이것이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이자 그들만이 할 수 있는 격이라고 느꼈다. 아모레퍼시픽이니까, '태평양 화학'이라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달려온 아모레퍼시픽이기 때문에. 이런 규모의 전시를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감동이었다.
셋,
좋은 기획은 내부에서 출발한다
속에서부터 빛이 나는 광채를 '속광'이라 부르던가? 그렇다면 이 전시를 '속광기획'이라 부르고 싶다. 깊은 복도 속에서 묵묵히 일하던 연구원들을 꺼내 환하게 비추었더니,, 은은하게 빛이 난다. 어디서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내부 자원(직원)을 가지고 이렇게 전시로 표현하다니. 이런 브랜딩을 어느 누가 감히 쉽게 따라 할 수 있을까? 이미 70년이란 축적의 시간부터 엄청난 진입장벽이다.
조심스럽지만 예상해 본다. 이번 전시를 위해 내부 직원들을 설득하는 과정, 분명 어려웠을 것이다. 주말 근무한다고 투덜, 북촌은 집에서 멀다고 투덜, 난 부끄러워서 이런 거 못한다고 손사래 치는 연구소 직원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보안에 민감하고 극도로 보수적인 조직을 설득해서 이렇게 직접 전시를 주도적으로 이끌게 하고, 이들을 전면에 내세우기까지.. 분명히 내부에선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운 걸 해내니, 어떤 기업에서도 볼 수 없던 진한 감동이 느껴진다.
전시를 마무리하는 동선에는 판매를 위한 조그만 매대가 있다. 심지어 이 세일즈 공간에도 알바생 아닌 진짜 연구원님이 상주하면서 직접 응대를 한다. 그녀가 로션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도 민감성 피부인데, 이거는 가지고 다니면서 수시로 발라요.." 세상에 이렇게 강력한 영업멘트가 또 있을까?
자기가 만들어 자기 얼굴에 바를 정도면, 그냥 말 다한거지. 바로 설득을 당했다. (심지어 그분의 피부도 아주 고우셨다) 집에 오자마자, 에스트라 브랜드의 더마 UV365 선크림을 주문했다. 어떠한 상세페이지, 블로그 후기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바로 [구매] 버튼을 눌렀다. 이미 '만든 사람'의 얼굴과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구매 의사 결정이 끝나 있었으니까.
요즘은 생산이 쉬워졌다. OEM으로 누구나 화장품이나 음료를 만들어서 팔 수 있다. 공장도 없어도 되고, 연구소는 더욱 없어도 된다. 그래도 상품을 팔 수 있다. (빌리면 되니까!) 그래서 나는 더욱더 R&D에 투자하는 기업이 귀하게 여겨진다. 이들은 단순히 잘 팔리는 상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모레퍼시픽은 '원료식물원'을 가꾼다. 인삼, 감초, 작약 .. 설화수에 들어가는 원료부터 직접 키우고 연구를 멈추지 않는다. 화장수 한 방울을 만들기 위해 꽃씨부터 뿌리는 기업. R&D에 진심으로 투자하고 한국의 재료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기업. 나는 아모레퍼시픽을 어느샌가 응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