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자와 여유로운 자
숙면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보스턴에서 한 침대를 썼을 때는 기다려도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프로비던스에 방 2개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자연스럽게 각방을 썼다.
일 년 동안 항상 잠이 부족했기 때문에 일단 잠을 편하게 잘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2개월 후에 크리스마스와 함께 새 생명이 찾아왔다.
자연 임신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기에 더욱 기뻤다.
곧 무시무시한 입덧이 찾아오리라 생각하며 기다지만 변화가 없었다.
세 달이 지나도 아무런 증상이 없으니 혹시 태아에게 이상이 있는 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다행히도 아기는 뱃속에서 잘 자라고 있었다.
어느새 임신 8개월이 되었다.
배가 눈에 띄게 불렀다.
자동차를 살 때가 되었다.
남편과 함께 미국 도로교통 공단인 DMV에 운전면허 시험 신청을 하러 갔다.
가기 전에 웹사이터에 나온 필요한 서류와 신분증을 챙겨 갔다.
그중에는 남편의 비자 서류 복사본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자 원본 서류 갖고 오세요."
"네? 원본이요? 복사본 밖에 없는데요."
"안 돼요. 원본 갖고 오세요."
우리는 시험 신청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남편이 학교 사무실에 연락을 해서 원본을 부탁했다.
학교에서는 원본은 줄 수 없고 복사본이면 된다고 했다.
며칠 후, 우리는 다시 DMV에 갔다.
"학교에서 복사본이면 된다는데요?"
"안 돼요."
항의도 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몇 주 있으면 아기가 나올 텐데, 미국에서는 자동차가 없으면 큰일이다.
남편에게 학교에 가서 다시 물어보라고 보냈다.
남편은 일단 이야기를 해두었으니 기다려보자고 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때, 내 영어 선생님이자 이웃인 존이 나섰다.
칠순이 넘은 그와 나는 DMV에 갔다.
이번에도 직원은 원본을 갖고 와야만 한다고 했다.
우린 남편이 일하는 브라운 대학교 오피스에 찾아갔다.
존은 담당자를 찾았다.
중년의 미국인 여자가 나왔다.
존이 말했다.
"지금 이 여자 배 나온 거 보여요? 만삭이에요. 운전면허 시험을 봐야지 차를 사는데, 원본을 안 주면 어쩌자는 거예요? 당장 줘요."
존의 당당한 요구에 담당자는 '이 사람은 대체 뭐지?'라는 어의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존의 손가락이 가르친 곳에는 배가 남산만큼 부른 내가 서 있었다.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결국 그녀는 "이번 한 번 만이에요. 이건 완전 예외적인 일이에요. 시험 접수 하자마자 다시 반납하셔야 해요."
'배드 캅, 굿 캅.' 작전이 먹힌거다.
원본 서류를 갖고 DMV로 가서 우리 두 사람 시험을 신청했다.
필기 시험과 실기 시험에 합격하고 드디어 차를 샀다.
남편은 여전히 느긋하다.
될 일은 언젠가는 된다고 생각한다.
반면 나는 성격이 급하다.
어떻게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덕분에 참을성이 없는 내가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서게 된다.
사람들을 찾고, 만나고, 싸우기도 하고, 일을 해결한다.
조선 시대에도 그랬다지?
선비 남편을 둔 아내는 부지런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느긋한 사람과 성격이 급한 사람이 만나면, 후자의 손발이 더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