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은유를 뒤집고 싶어서 쓰는 글
공부를 하지 않겠다 말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흘러, 아이는 어느새 중학교 3학년이 되었어요. 조금만 늦게 크길 바라는데 자꾸자꾸 자랍니다. 키만큼 생각과 마음의 크기도 함께 자라길 바라지만 그것은 저의 바람일 뿐이죠. 지금 아이는 무슨 일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있습니다. 그 나이의 에너지는 위험과 가능성의 경계 위에서 늘 출렁입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매 순간 고민에 빠집니다. 다그쳐서 끌고 가야 할까, 살살 구슬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까. 아니면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런 마음이 들 때까지 내버려 두어야 하는 걸까.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미묘한 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은 상상하여 만들기, 아무것도 하지 않기, 그리고 몸을 쓰는 일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의 열정은 놀라울 정도로 큽니다. 새벽에도 몸을 일으키게 하고 스스로 몰입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음 한편에서 안도와 불안이 동시에 고개를 듭니다. ‘이 열정이 공부로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바람과 ‘이 열정이 언젠가 그만의 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교차합니다.
때때로 나는 내가 잘하는 일을 하고, 아이는 아이가 잘하는 일을 하게 두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기다리는 일은 제가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공이 튀어 오르면 끝까지 통통거리게 두었다가 어느새 잠잠해지면 그 자리가 어디건 다시 가져와 원하는 곳에 돌려두는 일.
이런 식으로 지내면 나중은 어떨까 또 생각을 굴려봅니다. 훗날 “왜 공부를 시키지 않았어?” 라고 다 큰 아이가 저에게 묻습니다. 사이가 나쁘진 않을 테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하고 싶은 공부를 해.' 하고 웃으며 격려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자리는 일은 늘 기쁨과 두려움이 함께합니다. 양육의 딜레마는 매 순간 반복되고, 그럼에도 태도를 정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선택한 방법은 ‘함께 있음’입니다. 성취 중심으로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함께 있는 것, 기다려주는 것, 흐름을 신뢰하는 것은 어쩌면 이상에 가깝습니다.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결과를 알 수 없기에 매 순간 저 자신의 선택을 의심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불확실성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자신을 강제로 끌고 가지 않고, 판단 대신 지켜봐 준다는 경험은 깊은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공부보다 훨씬 근본적인 내적 힘, ‘나를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감각을 길러줍니다. 그 믿음은 언젠가 공부의 근력보다 더 오래가는 자존감의 연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외부에서 방향이 제시되지 않을 때, 아이는 자기 속도를 스스로 감각하게 됩니다. 그건 느려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자율성과 자기 효능감을 키워주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위험도 있죠. 방임에 가까워지면 아이는 ‘엄마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소 무심한 거리 두기와 신뢰 어린 기다림의 차이를 아이가 느낄 수 있도록 애씁니다.
공부하라는 말 대신 “오늘 배구 스파이크는 어땠어? 하고 묻습니다. 관심이 있고, 그 열심의 과정을 함께 짚어보며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다”라는 메시지를 건넵니다. 단답형으로 답할 때가 더 많지만, 때론 과정을 세세히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그럴 때 아이의 눈은 반짝거리고, 행복해 보입니다.
지쳐 돌아오면 쉴 수 있는 쉼터가 되어주고 싶습니다. 이 태도는 제 삶을 대하는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단기 성과형은 아니지만 불안 속에서 신뢰를 계속 선택하는 일입니다. 그건 아이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나 자신을 단련시키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아이를 작품처럼 만든다’는 오래된 은유를 뒤집고 싶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와 다르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자식은 소설의 플롯이 아닙니다. 아이의 입체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부모는 그것을 통제하려 애쓰기보다,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아이는 어느 순간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문학적으로 번역하면,
인물이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이야기는 플롯의 궤도에서 벗어나 다성성을 획득한다.
라 말할 수 있습니다.
작가에게 그런 순간은 기적입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 또한 매일의 그런 기적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들의 예측 불가능함, 다층적인 감정과 변화는 살아 있다는 반증입니다. 플롯대로만 움직이는 아이는 지금 당장은 부모 뜻대로 되는 듯해 만족스러울지 모릅니다. 내가 그린 방향성과 완성도 안에서 계획대로 흘러가니 흡족하죠. 하지만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 연출된 장면일 뿐입니다. 살아 있는 이야기는 언제나 플롯을 벗어난 곳에서 자라납니다.
아이를 작품처럼 본다는 말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많은 부모가 그렇게 느끼죠. 아이를 하나의 창작물처럼 생각하고, 그 안에 자신이 믿는 가치와 모양을 새겨 넣으려 합니다. 어릴 적부터 ‘좋은 재료’를 고르고, 흠이 생기지 않게 닦고, 다듬고, 형태를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아이는 마치 작가가 쓴 한 편의 시처럼, 조각가가 빚은 조형물처럼 보여서 마음이 놓입니다.
수많은 부모가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합니다. 아이는 '내가 만든 세계의 일부'이고, 그 세계 안에서 바르고 강하고 단정하게 자라나야 한다고. 그때의 부모는 작가입니다. 삶의 재료를 쥐고, 방향을 결정하고, 완성의 책임을 떠안습니다.
하지만 그 시선은 언제나 창작자 중심입니다. 아이는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입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부모의 의도와 통제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완성된 작품처럼 아름답지만 동시에 틀에 갇혀 있습니다. 부모는 “내 아이가 잘 자랐다” 말하며 뿌듯해하지만, 그건 어쩌면 “내 작품이 의도대로 완성됐다.”는 안도감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이 사고 안에서 아이는 언제나 ‘만들어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은 작품이 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는 늘 계획에서 벗어나고,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자랍니다. 그건 실패가 아니라 생명력 자체입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부모는 작가가 아니라 이야기의 동행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아이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불안을 견디며 함께 자라는 일'입니다. 나는 여전히 흔들리겠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도 믿습니다. 함께 있는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다고. 아이의 속도는 다를지라도, 그 길 위에서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자라고 있으리라 믿는 것이죠.
부모가 작가의 자리를 내려놓는 순간 아이의 인생은 하나의 서사가 됩니다.
그 서사는 교육의 결과가 아니라 서로의 시간과 감정이 얽혀 만들어낸 공존의 이야기입니다.
아이의 삶을 지도가 아니라 ‘서사’로 본다는 것. 그건 교육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아이는 한 편의 이야기 속에서 함께 등장하는 인물이 되어 주체적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존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