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방을 가진 시간

경험으로 다가온 개념

by 요인영



금요일 서울의 한 요가원에서 “시와 인요가”라는 주제로 색다른 요가수련이 진행되었다.


인요가를 할 때면 특별한 시간감각을 갖게 된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이 되고, 그로인해 어떠한 설명 없이도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인요가는 동작의 속도는 느리고 목표가 없다. 언제 마침표를 찍느냐보다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가 중요해진다.


이때의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머무를 수 있는 방을 가진 시간이 된다. 인요가를 할 때면 5분이 30분처럼 늘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5분이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이는 시간이 변했다기보다 내 안에서 시간을 재는 기준이 달라졌다는 뜻에 가깝다.


시간이 길이 아니라 방으로 경험되는 순간, 속도는 의미를 잃고 목적은 느슨해진다. 얼마나 갔는가보다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가 중요해진다.


인요가는 이러한 시간의 상대성을 몸으로 재현해 보는 하나의 실험실이 된다.


인요가의 시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내가 경험하는 시간의 밀도와 의미가 달라진다. 우리와 함께 흐르는 시간은 길과 같아서 지나가야 하고, 밀리고, 되돌아갈 수 없는 통로에 가깝다. 그러나 인요가의 시간은 통로가 아니라 머물 수 있는 방처럼 작동한다. 방에 머무는 동안 몸의 상태는 이미 이전과 달라져 있다. 쫓기듯 사는 세상 속에서 시간의 밀도와 의미가 달라지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인요가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싱잉볼의 파장 사이로 내가 쓴 시가 낭독되었다.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자문했지만 알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무뎌진걸까. 대나무도 아닌데, 속이 빈 걸까.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담담함이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졌다.


보통 내 안에서 나온 것이 바깥으로 퍼질 때에는 요동치기 마련이다. 뿌듯함, 민망함, 인정받고 싶은 마음, 혹은 도망치고 싶은 충동까지. 감정은 늘 여러 갈래로 흩어진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부끄러움만은 남아있었다. 마치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그러나 우쭐함도,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평가를 감지하려는 촉각도 없다는 사실이 두렵게 느껴졌다.


그 시는 더 이상 나를 증명하지 않는 것이었을까.


시가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 공간 속에 놓였고, 나는 그것을 소유하지도, 방어하지도 않는 상태에 가까웠다. 그저 호흡처럼 기능하고 있었다. 인요가는 머묾의 시간이다. 아사나와 싱잉볼의 파장 사이에 놓인 시의 낭독은 발표라기보다 우연히 날아와 잠시 깃든 체류에 가까웠다. 과장할 필요조차 없는 기쁨이란 것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지도 모른다.


싱잉볼 사이의 시,

소유되지 않은 발화,

평가가 작동하지 않던 순간.

전부 같은 시간대에 속해 있었다.


철학자의 시간론을 빌려 말하자면,

그 시간은 내가 이끄는 현재가 아니라

타자의 도래로 비로소 열리는 시간이었다.


이해되지 않던 문장이

몸의 경험으로 먼저 와 닿은 순간이었다.





인요가라는 이름이 생소할 수 있습니다.

거창한 수련이나 특별한 기술을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인요가는 그저,

내 몸이 다시 땅에 닿아 있다는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움직임을 최소화한 시간에 가깝습니다.


단단한 쿠션이나 커다란 베개처럼

내 몸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어깨를 포근히 감싸줄 담요는 덤입니다.

완벽한 도구보다 중요한 것은

몸의 무게를 스스로 지탱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입니다.


자세를 잘 만들 필요도,

어떤 목표에 도달하려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몸을 내려놓고,

호흡이 제 속도로 돌아오는 것을

잠시 허락하는 일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26화요가매트를 펼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