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독에서 만나요
한번 안경을 쓰게 되면 벗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눈앞에 얇게 걸린 유리조각 하나가 세상을 뽀드득 닦는다. 조금 더 밝고, 거칠고, 확고해진 인상으로.
안경을 벗는 순간 경계는 모호해지고, 사물은 부드럽게 풀어진다. 익숙했던 날카로운 선들이 사라지면서 누군가 볼륨을 줄인 듯 사물은 소곤거린다. 그래서 더 가까이 귀를 기울이고, 오래 쓰다듬고, 길게 바라보게 된다.
안경 없이 대했던 날들이 기억보다 빠르게 흐릿해지는 중이다.
안경을 쓰게 되면, 오래전 내 것 같았던 불편함을 또다시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흐릿하고 찌그러진 상을 마주 본다. 거울에 비치듯 인상도 찌푸려진다.
세상과 나는 오늘도 그렇게 불화한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지체 없이 반짝이는 다섯 개의 이어링, 가느다란 목에 순간 빛나고 사라질 듯 걸린 목걸이, 삶을 지탱해 온 발목에 족쇄처럼 매달린 가열찬 반짝거림까지. 반짝임의 극적 효과를 위해 담백함 혹은 흐트러짐을 사용한다.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지만, 타인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자연의 질서와 다르지 않다. 자연 역시 화려한 방식으로 생존을 과시하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이 내 몸이라는 투박함에 기대어 나름의 질서를 보여준다. 마치 몸의 일부처럼, 그러기로 결심한 듯 반짝인다. 잡초와 꽃이 서로 기대어 자라듯 단순함과 화려함의 대비는 어색하지 않다. 서로를 선명하게 만드는 자연스러운 공존이다.
우아함은 백색의 찬란함으로 고요히 빛나고, 화려함은 빨강의 호들갑처럼 시끄럽게 흔들린다. 이 대립조차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 먼저 보여준 방식이다.
요가의 프라티야하라pratyāhāra는 보통 감각의 철수라고 번역되지만, 실제로는 감각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상태에 가깝다. 그런 뜻에서 철수보다는 철회에 가까운 상태다. 철회는 감각이 바깥으로 뻗치는 것이 아닌 안쪽으로 접히는 것이다. 이 어려운 감각은 ‘힘을 빼며 안쪽으로 다감하게 수렴하는 느낌’, 그런 것이 있다면 감각의 촉수를 부드럽게 안으로 당기는 것이다.
간격의 생성, 사물과 나 사이에 아주 얇은 막이 생기고, 그 막 덕분에 세계는 덜 공격적이 되고, 나는 세상을 조건반사하지 않는다. 이것은 ‘안경을 벗는 순간 경계가 모호해지고, 사물은 부드럽게 풀어지는’것과 유사하다. 사물의 윤곽이 사라진 자리 나의 인식은 시각에서 감각으로 이동한다. 그래서 ‘사물은 소곤거리고, 더 가까이 귀를 기울이고, 오래 쓰다듬고, 길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멀게만 느껴지던 프라티야하라를 사물을 통해 체감하는 순간이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요가의 언어들은 증명할 수 없기에 개인의 수련과 체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기에 옳고 그름은 없다. 내게 선명한 세상이 다른 이에겐 보이지 않거나 흐릿할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표현은 삭막해지고 세계는 한층 더 편협해진다.
아도 무카 스바나아사나는 앞의 긴 용어보다는 다운독이라 간단히 불린다.
어떠한 요가의 흐름이건 전환의 중간에 서 있는 이 자세는 완전함 쉼도 그렇다고 밀어붙임도 아니다. 다운독은 그래서 일종의 중간 쉼표 같다. 문장은 계속 이어지지만, 그 짧은 멈춤 덕분에 다음 동작의 의미가 다시 살아난다. 흐름 속에서 잠깐 떠올라 자신에게 귀 기울이는 순간. 그것이 다운독의 역할이다.
다운독이 아직 몸에 익지 않았다면, 이 자세는 도시의 골목처럼 낯설고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다. 땀으로 미끄러지는 손과 발, 당기는 허벅지 뒤쪽과 그로 인해 말리는 아래 허리는 '이건 쉬는 자세가 아니야'라고 내적 비명을 지른다. 팽팽히 밀고 당기는 근육의 결 속에서 적절한 균형점 위에 손과 발이 숨이 놓여있어야 쉴 수 있다.
조금씩 시간을 들여 머물러야 한다. 골목들이 익숙해지고, 서서히 지도가 만들어지길. 땅이 손바닥을 지지하는 감각을 미는 힘을 통해 인지하고, 그 힘이 손목을 타고 견갑에 이른다. 숨결에 맞춰 길어진 척추는 바닥과 멀어져 있지만 중력을 거스르지 않는다.
프라티야하라는 순간에 대한 반응을 반사적으로 하지 않고 조용히 관찰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불편하니 바로 풀어야지’가 아니라 ‘지금 이 감각이 어디로부터 오고,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자’라는 태도에 가깝다. 불편하게 미끄러지는 감각을 즉각적으로 솟아오르는 감정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집중 상태다.
눈을 가볍게 감고
얼굴의 긴장을 풀고
호흡이 스스로 고요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우리는 쉴 때 언제든 프라티야하라에 접속할 수 있다.
감각을 거두어들여 호흡만 남게 하는 것.
미세한 호흡조절에는 한 걸음 다가가는 것.
평상시 숨에 대한 자각이 없기에 내 호흡이 어떤 식으로 흐르는지 알지 못한다.
식물이 빛을 향해 잎을 펴는 이유는 성장의 지표들이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호흡도 그와 마찬가지로 산소가 있는 외부를 향해 자연스레 방향을 잡는다. 호흡은 외부 자극을 기준으로 리듬을 조절하고, 외부 공기를 받아들이기 위해 신체 구조를 확장하며, 신경계는 외부 세계에 맞춰 호흡을 조절한다. 그래서 숨은 자연스럽게 안쪽보다 바깥을 먼저 향한다. 음식이 인간의 성장에 절대적이라 여기지만, 호흡은 그에 앞서 삶 자체를 지탱한다는 점에서 절박하다.
너무도 자연스러워 숨의 고유한 모양을 쉽게 망각한다.
들이마신 숨이 폐를 열어젖히고, 내쉬는 숨이 바깥의 온도를 몸 밖으로 밀어내는 동안, 호흡은 끊임없이 바깥과 접촉한다. 몸 전체가 보이지 않는 팔을 뻗어 세계의 기류를 더듬고 있는 셈이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공기, 온도, 냄새, 움직임과 알게 모르게 접촉한다. 의도하지 않아도 숨은 이미 세계를 향해 있다. 늘 밖을 향해 흐르는 것이 자연스러워 우리는 숨 쉬는 법을 잊는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호흡의 대부분은 스트레스 상태에서 굳어진 패턴일 수 있다.
가슴으로만 숨 쉬고,
짧고 잦으며
목 주변이 경직된다.
들숨이 내쉼보다 긴 패턴.
이 숨은 신경계의 긴장상태를 유도한다.
몸은 위험이 없는데도, 마음은 계속 위험을 감지하는 상태가 된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유 없이 심장이 뛰고 초조하다면, 신경이 과민하고, 늘 피로하며 주의력이 떨어진다면 내 숨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호흡을 바라보지 않으면 어느 순간 호흡도 나를 외면한다.
숨에게 외면당한 몸은 자연스러운 굴곡과 구조를 잃어버린다. 횡격막은 위로 들리고, 복부는 단단하게 굳으며, 어깨는 솟고, 목 주변은 늘 긴장될 수밖에 없다. 호흡은 아래로 바깥으로 그리고 다시 안으로 흘러들어와야 한다.
사바아사나는 프라티야하라의 주요 무대이다.
바닥에 누워 있으면 시각 자극이 자연스레 차단되고 촉각만 남는다. 그 촉각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옅어진다. 몸을 통해 마음으로 전달되는 감각의 끈들이 풀어지며 프라티야하라의 단계로 접어든다. 감각이 완전히 없어진 듯 보이지만 이때에는 감각의 밀도가 다른 층으로 이동한 것에 가깝다.
이런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요가원 문이 닫히는 순간, 공간의 공기가 다른 층으로 이동한 듯 달라진 느낌
모든 사람이 동시에 숨을 고르게 맞추기 시작하는 경이로움
아사나가 깊어지면서 말은 줄고, 음악도 주변 사람도 사라진 듯한 순간
몸의 미세한 불편이 더 이상 방해가 아니라 어떤 신호처럼 느껴질 때
프라티야하라가 내게 스며드는 순간이다.
프라티야하라는 무의식적 호흡 패턴에서 잠시 벗어나 숨이 안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을 만드는 기술이다.
감각이 고요해지면 숨이 다시 자연의 리듬을 되찾고, 숨이 정리되면 몸과 마음이 정렬된다.
요가에서 숨은 의식의 근육이다.
알아차리면, 숨도 나를 마주 바라본다.
나는 안경을 손에 들고, 반짝이는 무늬들을 걸친 채, 그 얇은 빛의 층을 통해 세계와 부드럽게 마찰한다.
구겨진 감각을 표현이라는 열을 가해 매끄럽게 펴본다. 표현은 손가락 끝으로 옷자락을 붙들고 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아 불안하고, 그래서 무엇이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이 되어 문질러서라도 반짝거리는 하루를.
오늘은 억지로 반짝였어도 내일은 어쩔 수 없이 반짝이도록.
이미지 모두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