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내려 이미 바닥에 닿은
여전히 맨발이었다. 낮에는 기온이 올랐지만 아침기온은 너그럽지 않아 발가락이 차게 식었다. 온기 없는 요가원 바닥을 작은 수고로 데우며, 요가 매트 위에 발바닥을 맞붙이고 앉는다. 맞붙은 작은 온기와 호흡이라는 적은 수고를 들이면 발가락은 어느새 매트 위에 녹아든다.
‘결합된 모서리’라는 뜻의 요가 아사나가 있다. 나비자세라 부르는 이유는 두 발바닥을 마주대고 무릎을 위아래로 움직이면 나비가 날갯짓하는 모습과 유사하여 붙여졌다. 이 자세에서 무릎이 내려가지 않는 경우와 한쪽 무릎만 뜨는 경우를 본다. 가장 흔한 이유는 골반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안 되는 자세는 내 몸을 탓하기에 앞서 그 모양을 만들 수 없는 근본적인 구조에 대해 한번쯤은 의문해 봐야 한다.
심신의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요가의 각각의 자세들은 상징성을 갖고 있지만, 형태가 곧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티칭에 ‘방향을 맞춘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모양은 중요치 않습니다. 방향을 맞추면 됩니다.” 따지자면 맞는 말이 아님에도 자주 쓰는 이유는 제각각인 상황에서도 일관성을 띤 것은 때론 이정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되지 않는 자세에 감정이 스미는 것을 본다. 때론 과열되고, 한편으론 차게 식는다. 어떤 경우는 요가를 계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반대의 경우는 발길을 돌리게 만든다. 난 퍼포먼스가 부족한 사람이라 말로 그 응고된 틀을, 과열된 감정을 조금은 허물고, 가끔은 식힐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완벽
자세가 조금만 어긋나도 ‘틀렸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수련 중에도 거울이나 강사의 시선을 끊임없이 확인하며, ‘내가 잘하고 있나?’에 집중한다. 몸보다 머리가 앞서 호흡이 막히고, 몸은 더욱 굳는다. 이런 이에게 조언은 급한 변명거리를 쏟아내게 하고, 과거의 좋았던 시절까지 불러오게 한다. 간파당했다는 것을 분해하는 사람도 있다.
형태보다 감각으로 돌아가기, 완벽한 형태는 없음을 스스로 자각할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 교정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이럴 경우는 교정하지 않고 기다린다. 지도자는 모양을 바꾸지 않고 방향만 보여준다. 수련자 스스로 방향을 따라 몸 안의 공간을 발견할 때까지.
완성은 형태에 있지 않음을, 내가 느끼는 감각에 있음을 알게 될 때까지.
성과
다른 경우는 ‘내가 이 자세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성취감으로 움직인다. 그 순간의 기쁨은 너무도 환하여 주변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한다. 이런 기쁨은 종종 욕망의 문을 두드리곤 한다. 자세가 안 될 때는 조급해지고, ‘다른 사람은 하는데, 왜 나는…’ 식의 비교가 시작된다. 이럴 경우 몸은 의욕에 비해 준비가 덜 되어 부상 위험이 매우 높아진다. 몸이 시선에 끌려가 타인의 리듬을 모방하는 도구가 되어버린다. 가장 심각한 것은 호흡의 감각을 닫아버린다는 것이다.
요가는 싸움이 아니다. 자세가 흐트러질 때마다 조급함이 스며들고, 옆자리의 누군가가 쉽게 해내는 것을 볼 때마다 비교가 일어난다. 비교는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때 부상은 단순한 근육의 손상이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가 무너진 결과이기도 하다.
수련은 경쟁의 장이 아니라 그 본능마저 조용히 녹아내리는 시간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지워내려 하기보다는 비교를 멈추는 용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회피
자세가 안되면 ‘괜찮아, 굳이 안 해도 돼.’라며 한발 물러선다. 몸의 불편함과 실패의 느낌에 감정적으로 예민하여 도전보다는 늘 안정을 우선시한다. 어찌 생각하면 이것은 옳은 방향처럼 보일 수도 있다. 자기의 한계를 스스로 깨닫고 한 발 물러서는 모습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보호의 언어이자, 자기 제한의 신호다. ‘괜찮다’는 겉으로는 평온한 말이지만, 속뜻은 ‘상처받기 싫다’에 가깝다. 그러나 몸의 한계를 존중하는 것과 한계를 회피하는 것은 미묘하게 다르다.
요가는 때론 불편함을 견디는 연습이다. 불편함 속에서 자기 자신과 매 순간 새롭게 관계를 맺는다.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머무는 것.
불편함에 머묾을 연습하면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요가 외의 시간에도 흔들릴 때 당황하지 않게 된다. 흔들림은 무너짐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새로운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 순간, 나의 또 다른 모습에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는 여유를 갖게 된다.
관계
강사의 반응에 매우 민감한 이들은 자세가 잘 안 될 경우에 ‘선생님이 실망했을까?’, ‘다른 사람은 나보다 낫겠지?’ 같은 생각을 한다. 몸의 감각보다 타인의 표정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판단한다. 요가 매트 위에서도 자신을 감각으로 느끼기보다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확인하려 한다. 이들은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도 내 몸과 마음의 온전한 주인이기 어렵다.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으나 요가는 관계를 맺는 기술이 아니다. 관계가 사라졌을 때도 자신에게 머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어쩌면 관계를 단절시키는 일일 수 있다. 몸이 조금 기울었을 때, ‘괜찮다.’ 스스로 말해줄 수 있는 내면의 교사를 만드는 일. 내 약함과 친해지고, 타인의 시선이 없어도 무너지지 않는 연약하지만 동시에 괜찮은 사람임을 깨닫는 일이다.
나비자세에서 무릎은 부러 내리는 것이 아니라 흘러내려 이미 바닥에 닿는 것이다. 어떤 아사나는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저항을 멈췄을 때 도달하는 균형의 상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균형의 상징성을 단어자체로 드러내는 아사나가 있다.
파드마 아사나는 연꽃 자세를 말한다.
‘진흙 위에 피어나 발을 디딘 듯한’이라는 뜻으로 완결보다는 이미지가 끊임없이 연장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연꽃의 형태로 앉아 있는 마치 정신이 중심에 고요히 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듯하다.
‘파드마를 짠다’는 것은 그 단단한 결합구조가 이미 머릿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파드마는 양발을 서로 반대편 허벅지 위에 얹는 좌법이다. 단순히 다리를 꼬는 것이 아니라 좌우, 상하, 내회전과 외회전 등 서로 반대되는 힘들이 정교하게 조율될 때만 가능하다. 마치 실을 교차시켜 견고한 직물을 만들어내듯 몸의 여러 방향성이 서로 얽히며 하나의 구조를 짜는 행위다. 의식의 만들어낸 도면을 몸이라는 재료로 구현하는 일에 가깝다.
이 아사나도 나비자세처럼 ‘무릎을 부러 내려 바닥에 닿게’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속에 짜여 있던 구조가 몸을 통해 드러나는 순간'이다. 연꽃은 땅 위에서 피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접히고 펼쳐져 문양으로 존재한다. 요가 수련자는 그 문양을 기억해 내기 위해 앉을 뿐이다. 무릎을 내리고, 척추를 세우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만 잊고 있던 내면의 연꽃을 몸을 그려낼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한 송이 연꽃을 피우고 있다.
이미지는 모두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