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더 나 같은 핵심감정
싫다라는 말 대신, 소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소외의 감정이라 적는다.
좋다라는 말 대신, 다가갈 수 없음을 기꺼이 견디는 감정이라 적는다.
싫다라는 말 대신, 감정보다 철학이 우선이라 적고,
좋다라는 말 대신, 소유보다 거리가 우선이라 적는다.
두 단어는 뒤돌면 서로를 바라보는 감정의 축이면서 동시에 언어의 가장 오래된 양극이다. 싫다라는 말 뒤엔 두려움이 숨어 있고, 좋다라는 말 뒤에 욕망이 숨죽인다. 감정은 늘 진실보다 한발 앞서 방어적이 된다.
싫다라고 말할 때 나는 내 경계를 지킬 수 있고, 좋다라고 말할 때는 경계가 흐릿해진다. 인간의 감정은 자기 보존과 개방 사이에서 진동한다. 그 간극이 때론 설레이고, 가끔 숨막힌다.
싫다는 타인과의 거리를 확보하고, 좋다는 그 거리를 담보한다. 모든 인간관계는 거리 조절의 예술이다. 우리는 상대를 통해서만, 동시에 상대로부터만 존재할 수 있다.
싫다라고 말할 때는 아직 나를 지키고 있고, 좋다라고 말할 때는 이미 나를 내어주고 있다. 감정의 방향은 타자에 대한 태도이자 자기 보존의 형태다.
이런 지지부진한 서두로 글을 쓰는 이유는 나의 핵심감정을 털어놓고 싶어서다.
폭죽이 팡팡 터질 것 같은 빛 좋은 토요일 아침. 꺼지지 않는 숯을 뒤적거려 아픈 상처를 돌본다. 사십장이 넘어가는 페이지를 이리저리 넘기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인지 혹은 내가 아닌지 판단하려 애쓴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핵심감정이라는 것은 은밀하며 단단한 물질이다. 오랜시간 나와 함께 에너지를 먹고 자라난 어쩌면 나보다 더 나 같은 존재. 완벽주의 성향은 어린시절 두려움과 소외의 감정에 기시한다.
기시점은 삭은 동아줄처럼 끊어질 듯 말 듯하고, 정지점은 눈 앞에 선명히 보인다. 정지점이 정지가 될수 없음은 아직 끊어지지 않은 동아줄의 완벽한 형태를 보며 섬뜩하게 깨닫는다.
핵심감정은 단순한 심리 상태의 발현이랄 수 없다. 한 사람의 삶을 조용히 조종하는 그림자가 있다. 이성보다 먼저 깨어나고, 의지보다 오래 남는 것. 그건 이해받지 못한 마음이 굳어 생긴 중심의 상처, 사랑받지 못해 움츠러든 영혼의 가장 오랜 흔적이다.
어린 시절, 인간은 누군가의 눈빛에 자신을 비추며 존재를 배운다. 눈이 흐린 그때에 세상은 엄마의 살 내음, 두근거리는 심장의 리듬, 젖이 돌아 만들어내는 따스함. 이것이 세상이고, 온 우주이다. 시각이 아닌 감각의 향연 속에서 아이는 안전함을 새긴다. 또렷하게 세상을 보기 시작할 즈음, 거울에 비친 엄마의 표정을 따라 웃고 울고 눈을 맞춘다. 감정을 외부에 반사된 모양으로 인식한다. 당신이 웃으면 나도 웃고 당신이 울면 나도 운다.
핵심감정의 발현은, 존재의 근육을 만들고 있을 시기에 이해받지 못해, 사랑받지 못해 상처받은 나의 불쌍한 영혼으로부터 온다. 외면당한 감정은 내면에 갇혀 굳어지고, 이해 받은 감정은 관계의 언어로 확장된다.
말을 배운다는 건 감정을 이름으로 묶는 일이다. 싫어, 좋아, 무서워. 라는 단어가 등장하면서 감정은 언어의 그물망 속에 갇히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진짜 두려움은 괜찮아로 바뀌고, 진짜 분노는 참을 수 있어가 된다. 사회화된 감정은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의 무덤 속에서 서서히 형태를 갖춘다. 핵심 감정은 이렇게 태어난다.
처음의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나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사랑, 부끄러움, 분노, 질투. 이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는 폭풍이다. 감정의 주체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이 감정이 곧 내가 된다.
내가 화난 게 아니라, 내가 곧 화가 된다.
이 격렬한 시기를 통과하면 핵심감정은 모양을 갖춘다. 누군가는 불안으로, 누군가는 죄책감으로, 또 누군가는 열망으로 자신을 정의내린다.
어른이 된 지금 표면은 잔잔해 보인다. 소외될까 두렵고, 인정받지 못할까 분투하며, 완전함으로 완벽을 가리려 든다. 과거의 감각적 기억은 하나의 무의식적 질량, 행동과 관계의 방향은 중력처럼 내 방향성을 결정짓는다.
핵심감정은 어떤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시간과 경험이 빚어낸 감정의 결정이다. 몸으로 세계를 느끼던 유아기부터의 감각이 언어로 변하고, 사회적 역할로 번역되면서 그 밑에 남아 만들어진다.
그것은 관계 속에서만 자라는 불가분의 씨앗이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 인정받고 싶은 갈망이 바로 빛과 물이다. 욕망이 반복적으로 좌절될 때, 감정은 보호막의 형태로 변형된다. 두려움은 통제로, 결핍은 규율로, 상처는 완벽으로 옮겨간다. 어린 시절 불안한 사랑은 세상에 대한 신뢰를 익히기도 전에 불확실성의 감각을 먼저 배우게 만든다. 감정의 신경회로는 위험을 감지하도록 학습되고, 관계는 위험한 것으로, 실수는 존재의 위협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완벽주의자는 정확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절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된다. 스스로를 통제하면 버림받지 않을거라 믿고, 자신의 결함을 끊임없이 다듬으면 언젠가 완벽히 사랑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흠 없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완벽주의는 불안을 없애려는 시도이면서 동시에 불안을 구조화하여 지속시키는 시스템이 된다. 완벽은 결코 도달할 수 없으므로, 완벽주의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심판한다. 내면의 법정에서 선고받은 것은 오늘도 유죄이다.
완벽주의자는 늘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 날 나를 칭찬해 주지 않은 어른
끝내 나를 인정하지 않은 부모
무죄가 선고되길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내게 탄원한다.
명상은 그런 나를 그저 바라보는 시간이다.
내가 나가 아님을 감각해 보는 조용한 응시의 시간.
나라는 결정체를 바라보고 흘러가게 놓아두는 시간.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눈을 감았을 때 결정이 녹아 햇빛에 반짝이는 순간.
이제 그만 나를 괜찮다고 말해줘.
그건 겨울바람처럼 차갑고
봄 기운처럼 새롭다.
나는 없다. 다만 살아 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