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다
이렇게 다르기도 쉽지 않은데, 동기강사님과 나는 어느 하나 닮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주 보면 웃을 수 있어 다행인 나날이다. 그가 후굴 하는 모습을 보면 한 획으로 만든 예술품을 보는 듯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완벽하게 휘는 곡선을 바라보는 일은 그 자체로 감각을 일깨우는 듯하다. 나의 몸은 예전 글 ‘마흔의 맥락’에 올렸던 ‘나바아사나’ 같은 전굴에 강하다. 몸을 반으로 마치 폴더처럼 접는 아사나들. 후굴동작은 감각을 밖으로 펼쳐 관능적으로 보인다면 전굴동작은 감각을 안으로 감춰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흥미로운 점은 잘 되는 아사나의 특징이 두 사람의 성격과도 닮았다는 점이다. 후굴력은 외향, 활력, 표현과 개방성을 나타내고, 전굴력은 내향과 안정, 명상과 내면 통찰에 닿아 있다.
위의 문장을 보면 ‘잘 되는 몸’이란 표현이 나온다. 잘 된다는 것은 이런 경우이다. 근력과 유연성, 관절의 가동범위가 조화를 이루어 특정 아사나와 결이 맞을 때, 그 동작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된다. 여기서 '완성'은 기술이라기보다는 내 몸과 동작의 리듬이 일치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그런 것이 있다면, '동작의 기질이 성격의 기질과 닮았다.'라 표현하고 싶다.
움직임이 자아의 언어일 수 있을까?
자세의 완성 여부는 개인차가 크다. 누군가 “6개월만 하면 저처럼 될 수 있어요.”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 6개월이 아니라 6년일 수도 있다. 근력으로 만들어지는 동작은 시간이 해결하지만, 구조적 제약과 유연성의 한계는 다른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꾸준히 수련한다면’, 이란 조건이 붙을 때이다. 우리는 그것을 ‘인체의 신비’라 부른다. 안 되던 동작이 어느 날 갑자기 되는 일.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몸이 시간의 수혜를 입는 순간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뀐다 해도 꾸준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요가든 어떤 운동이든, 근력과 유연성, 관절의 가동범위, 신경계의 적응력(고유수용감각), 그리고 뇌의 움직임 학습 능력은 모두 개인마다 다르게 주어진다. 그러나 꾸준한 반복 속에서 신경근이 서서히 적응하면, 몸은 마침내 새로운 움직임을 받아들인다. 반복된 경험이 신경의 억제를 풀어내며 감각회로를 새로 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운동신경계의 억제 해제로 불리는 현상이다.
딸깍!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
동기강사와 나는 서로의 수업 시간에는 빠짐없이 출석해 수련한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기 때문인데, 회원들에게 아사나 시각자료(!)로 산 채로 활용(?)된다. 동기강사님은 후굴에 사용하는 척추기립근 모델로, 나는 전굴에 사용되는 햄스트링과 오리엉덩이 모델로.
전굴은 숨을 내쉬고 머금고 수렴하는 동작이다. 고관절을 중심으로 상체를 굽혀 하체 쪽으로 가까이 가져가며, 고관절이 경첩처럼 자연스럽게 접히는 것이 핵심이다. 아사나를 마치고 척추에 묵직한 부담이 남는다면 그것은 요추가 말리며 고관절의 경첩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신호다.
많은 이들이 몸을 완전히 접는 데 마음을 쏟지만, 전굴은 닿음의 기술이 아니다. 멈춤의 순간을 스스로에게 묻는 내면의 동작이다. 그 멈춤 속에서 숨은 더욱 미세해지고, 몸의 경계가 흐려진다. 햄스트링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면, 마음의 저항도 함께 느슨해진다. 잠시 멈춤 속에서 내면의 공간을 재정비하는 시간. 더 깊숙이 들어가려는 의지가 사라질 때에야 몸은 긴장을 풀고 스스로를 신뢰한다. 그 순간의 정적은 움직임의 부재가 아니라 움직임이 멈추어 도달한 고유한 형태가 된다.
후굴은 숨을 들이쉬며 몸을 세상 쪽으로 펼치는 일이다. 하체를 뿌리처럼 단단히 두고, 상체를 뒤로 젖혀 가슴을 활처럼 편다. 그러나 척추가 무겁게 반발한다면 그것은 몸이 이미 한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르드바 다누라사나나 우스트르사나 같은 자세는 제대로 피어나면 꽃이지만, 무리하면 곧 벼랑이다.
자세의 완성보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머무는 평온이다. 시선이 거꾸로 뒤집혔을 때조차 편안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체가 아니라 마음의 선택이다. 자신을 놓지 못하는 사람은 목 하나 뒤로 떨구지 못하고, 머리와 어깨 사이의 근육에 모든 저항을 쏟는다. 붙잡고 있는 것이 머리인지 아니면 그 안을 떠돌던 생각들인지 그제야 묻게 된다.
아사나를 마치고 몸을 다시 세워 올리면, 척추의 긴장이 서서히 풀린다. 세상을 향해 열려 있던 가슴이 닫히며 호흡이 안으로 돌아온다. 후굴은 단지 뒤로 젖히는 동작이 아니다. 펼침의 끝에서 마주하는 것은, 세상을 거꾸로 보기 전과 후 달라진 나의 시선이다.
처음엔 숨조차 짧다. 세상 밖으로 내던져진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가슴 안쪽은 불안감에 수선거린다. 하지만 거꾸로 보는 시간을 조금씩 연장하며 뒤집힌 채 리듬을 찾아간다. 확장된 몸과 호흡이 정돈되면서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는다.
후굴이 열림의 기술이라면, 그 마무리는 되돌아옴이다. 세상 바깥으로 펼쳐졌던 몸이 다시 중심을 찾아 돌아오는 순간, 작은 깨달음이 매트 위에 떨어진다. 진짜 확장은 밖이 아니라 안으로의 확장이었음을 알게 된다.
평소의 생활습관과 태도는 매트 위에서 저마다 형상을 취한다. 몸은 내 삶의 태도이자 생각의 지도가 된다.
예전의 요가는 가동범위 이상의 아사나를 추구했다. 내 가동범위 안에서 자유롭다면 그것은 언젠가 틀을 깨고 나올 것이기에 그 확장의 순간을 위해서라도 오늘 하루는 멈춰서 시선을 멀리 두어야 한다.
어느 지점에서 멈추는가는 오직 나의 몸을 들여다보고 정직한 합의하에 이뤄져야 한다. 이 지점이 모든 아사나의 기본 요소이다. 척추를 살리는 전굴은 척추의 자연스러운 만곡을 살린 상태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직립상태의 몸은 언제든 중력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만곡이다. 만곡을 지키는 전굴이란 무릎을 충분히 구부린 상태에서 복부와 허벅지를 닿게 한다는 의미이다. 전굴은 척추를 밀어붙이는 일이 아니라 척추가 스스로 숨 쉴 공간을 되찾도록 허락하는 일이다.
다치지 않는 후굴은 내 단단한 중심 안에서의 유연성이다. 근력이 받쳐주지 않는 후굴은 관절과 뼈에 무심히 흔적을 남기고 본질적인 치유력을 갉아먹는다. 그래서 탄성이 좋은 하체는 단단한 기반이며 뿌리를 깊이 내린 나무와 같다. 근력은 힘의 크기라기보단 다녀간 습득한 내 몸의 활용백서이다. 후굴아사나에서의 아름다움은 곡선을 오차 없이 지지하는 힘에서 나온다. 힘이 균형을 이루면 관절은 부드러운 선율처럼 움직이고, 척추는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나타난다. 흉곽이 충분히 확장되고 복부가 이완되면, 후굴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된다.
전굴과 후굴은 서로의 반대가 아니라, 호흡의 양 끝이다. 빈야사는 전굴과 후굴을 자연스러운 흐름 안에 놓아준다. 들숨과 날숨, 그 사이의 잠시 멈춤 속에서 아사나와 어우러져 지혜로운 방식으로 재배열된다.
빈야사 Vinyasa는 특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단계적으로 수련하는 것을 뜻한다. 그 흐름은 계절의 순환과 닮아 있다. 계절은 자연의 호흡인 바람에 의해 순환되며, 뜨거움의 간격과 기울어짐 안에서 천변만화를 재현한다. 전굴은 태양이 멀어지는 겨울의 각을 닮아 있고, 후굴은 햇살이 정점으로 치닫는 여름의 자세와 같다. 그 둘의 왕복 속에서 빈야사는 호흡의 사계를 돈다.
움직임의 각자의 언어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움직임이 같은 방향을 향해도 어느 하나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람과 비가 그린 지금의 계절, 내겐 가을이 아닌 어느 계절.
내일 있을 햇살이 천변만화의 빛깔로 공간을 또다시 바꿔놓듯 호흡 또한 전굴에서 후굴로, 후굴에서 다시 전굴로 흐른다. 빈야사라는 강은 들숨과 날숨의 교차로 움직임의 사계를 이어주며, 균형이란 이름의 운율을 매 순간 다시 짓는다.
같은 시퀀스 안에서조차 내 몸은 매일 다른 목소리를 낸다. 전굴 속에서의 겨울이 나를 더 깊이 안으로 데려가고, 후굴에서의 여름은 내 감각을 밖으로 밀어낸다. 그 사이 환한 틈에, 빈야사의 작은 멈춤이 깃든다.
요가 매트 위의 시간은 순환한다. 고요함이 찾아오고, 또다시 움직임이 태어난다. 누구도 닮지 않은 손 끝과 발 끝, 고유한 숨결이 오직 내 언어로 울린다. 그래서 오늘의 빈야사는, 어제와는 또 다른 계절을 각자의 몸으로 쓰는 고유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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