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명상
수확의 계절에 덩달아 익었는지 터진 열매 마냥 땀을 흘리는 남편을 뒤로하고 산길을 올랐다. 먼저 올라가라는 손짓이 먼저였는지 내 발이 먼저였는지. 평상시 같으면 설렁설렁 같이 올랐을 텐데, 다소 강한 바람을 맞으며 기분도 상승고도를 타니 걸음을 늦출 수가 없었다. 수족처럼 느껴지는 스틱을 쥐고 작은 보폭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내 비가 내려 낙엽을 밟으면 미끄러졌다. 밟히는 소리보다 뭉그러지는 감각을, 땀이 흐를 새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산을 올랐다. 숨이 점점 차오를 무렵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 옆길로 빠져 뒤를 돌아보았다. 빠르게 걷기는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발소리가 들린 후에야 깨달으며.
인요가를 배우는 과정에서 사주명리도 겉핥기식이지만 조금 알게 되었다. 네 개의 기둥, 시간의 구조 속에 새겨진 나의 지도. 불이 활활 타는 곳에 금의 기운이 언뜻언뜻 보였다. 내 지도에는 물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사막의 불모지 같았다. 화금상전이라 하던데, 불은 금을 녹인다. 이 지도는 긴장과 정련의 관계, 끊임없는 자기 단련의 과정으로 읽혔다. 물 기운의 부족은 감정적 흐름이 억제와 지나친 이성적, 의지 중심의 에너지 패턴으로 읽힌다. 물이 없는 지도는 어린 날 내면의 유연성의 결핍, 마음의 건조함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막은 정화와 명료함의 상징이기도 하니, 모든 불필요한 것이 타버린 뒤 남은 본질적인 공간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난 모든 것을 느슨하게 해야 하는 사람이란 것을 경험이 알려주었다. 고삐를 조이듯 타이트하면 줄이 끊어지는. 고삐를 조이면 조일수록 속력이 빨라지고, 날듯이 빛이 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볼 때마다 그들과 나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한 발 물러서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모든 존재는 다른 진동수를 가진다. 어떤 이는 빠른 파동 속에서 성장하고, 어떤 이는 느린 파동 속에서 깊어진다.
전자는 불의 꽃과 같고, 후자는 숯의 불과 같다.
인요가에서는 음과 양의 이치를 배운다. 서양 요가의 한 갈래지만, 이름에서 드러나듯 도가사상- 특히 음양오행-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음은 정적이고, 깊고, 내면적이며, 차분한 성질을 뜻한다. 양은 역동적이고 외향적이며, 뜨거운 성질이다. 인요가의 수련은 근육(양) 보다 결합조직, 인대, 관절 등의 음의 조직에 주의를 기울여, 몸의 깊은 층과 함께 마음의 정지를 경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움직임보다는 멈춤의 원리를 배우는 시간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재되어 있는 감각을 돌아보는 것이다. 요가의 Pratyahara(프라티야하라)는 감각의 내향을 말한다. 외부 자극을 거두고 내부 감각, 미묘한 진동, 기운의 흐름, 심리적 반응에 주의를 돌리는 단계다.
요가의 고난도 동작은 양날의 검 같은 것임을 시간이 흘러 알게 되었다. 몸이 열리면 욕망도 함께 열린다. 더 높이, 더 깊이, 더 멀리 가고 싶어진다. 그러나 요가가 수련인 이유는 욕망을 다루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요가는 단순한 신체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경계에서 머무는 기술이다.
고난도 동작이 필요하다 아니다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은 사실상 불필요하다. 그저 각자의 몸과 마음의 시계가 다를 뿐이다. 어떤 이는 몸의 정교한 구조를 탐구하며 자신을 알아가고, 어떤 이는 단 하나의 아사나로도 충분한 깊이를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비교가 아니라 자기와의 대화이다.
프라티야하라는 감각의 내향. 이 말은 감각을 억누르거나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아니다. 차단이 아니라 전환을 말한다.
우리의 감각은 늘 바깥을 향한다. 눈으로 이미지를 좇고, 귀로는 들으며, 혀로는 맛을 찾는다. 세상은 감각의 자극으로 넘쳐나고, 마음은 그 자극에 반응하느라 분주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감각은 내 것이 아니라 그 움직임에 휘둘려 다른 것이 되어 있다. 프라티야하라는 그 흐름을 거꾸로 돌리는 연습이다. 눈을 감되 세상을 부정하지 않고, 귀를 닫되 소리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저 감각이 흘러가는 방향을 조용히 되돌려, 다시 안으로 안으로.
고난도 동작을 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온다. 자세를 유지하느라 온몸의 근육이 사용되는데, 어느 순간 그 감각과 멀어진다. 아픔은 여전하다. 다만 그 아픔이 내 것이 아니라 느낌. 그저 일어났다 사라지는 하나의 현상처럼 보인다. 프라티야하라는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연습이다. 감각을 억누르는 대신, 감각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거리를 둔다.
모든 근육이 동원되지만 침묵하는 몸과 중심을 향하는 감각의 내향.
먹는 명상이란 것이 있다. 건포도 한 알을 바라보고 손에도 올려보고 가만가만 만져본다. 입안에 넣어 씹기 전의 형태를 혀로 알아보고 입에 고이는 침마저 감각해 보는 시간.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공들여 씹는다. 이 시간은 나와 건포도의 시간.
나는 이것을 조금 바꿔보았다. 씹는 행위가 빠지면 어떨까 잠시 고민했지만. 커피 명상을 해보고 싶었다. 와인처럼 입에 머금으면 될 것 같았다. 커피의 다양한 맛과 다층적으로 퍼지는 향을 씹는 대신 머금는다는 것으로. 언제나 형식을 벗어난 길을 택하고 싶다. 그러면서 본질, 감각의 집중은 여전히 안에 있다. 정해진 명상에 안주하지 않고, 내 리듬에 맞는 명상을 만들어가는 중에 있다. 내게 커피를 내리는 행위는 일상 명상의 시작이다. 명상이 꼭 고요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듯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의식의 초점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숯의 불은 오래가니 무엇이든 해보는 것으로.
누군가는 나의 온기로 데워지겠지.
사진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