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직 나와 숨

호흡이 전부일 수 있다

by 요인영



요가강사에 관한 오해는 이런 것들이다. 신체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채식을 할 것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 매일 수련을 한다. 유연하다.

오늘 몸을 풀었다고 그것이 내일까지 유지되는 일은 없다. 몸은 다시 널빤지로 회귀한다.


평온하고 침착할 것이다. 아픈 곳이 없을 것이다.

또 뭐가 있었지?

살이 안 찐다.


우리 회원님들은 나로 인하여 이 모든 환상이 깨졌지만, 전국의 많은 요가를 사랑하는 분들은 아직 이런 오해를 품고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운동강사로 오래 일한 사람들은 케바케이긴 하지만 크고 작은 만성통증을 안고 산다. 또 요가를 가르친다고 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니 그저 출퇴근하는 직장인일 뿐이다. 가장 큰 이유는 가르치는 일이 나를 위한 수련은 아니기 때문이다. 회원에게 몸으로 보여주기 위한 잦은 데모는 관절의 마모를 가져오고, 가동범위 이상의 움직임은 손상이 없을 수 없다. 크건 작건 목의 사용은 성대를 약화시킨다.


수업이 끝난 후에 동기 강사님과 나는 다음 수업 시퀀스를 구상한다. 보통 각자 준비한 후 테스트를 위해 서로의 몸을 빌리는 식. 바닥에 드러누워 어깨와 바닥이 떨어진 위치, 등허리가 뜬 각도를 확인한다. 링으로 하는 테라피 이후에 차이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거울 앞에 서서 골반의 높낮이를 체크하며 불균형의 정도를 확인한다. 매번 확인해도 몸은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인지하고 쓰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이다. 자신의 굳어진 형태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테라피 전과 후의 확연한 차이를 눈으로 확인하고 놀라곤 한다.


몸에 대한 평가에는 몇 가지 간단한 테스트들이 있어 그것을 수업에 적용한다. 토마스 테스트는 장요근의 단축이나 골반 경사, 다리 길이 등을 평가할 때 사용하고, SLR테스트는 햄스트링의 길이를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천골 아래 리커버링을 두고 장골능의 높낮이를 점검하기도 한다. 비교적 간단한 동작을 통해 내 몸의 상태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요가동작에서 좌우측 움직임을 할 때 잘 되는 쪽으로만 동작을 완성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것이다.


동기 강사님은 만성 골반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과도한 유연성으로 인해 복압을 잘 사용하지 않은 채 다년간 수련한 결과였다. 유연성으로 인해 자세는 잘 나오지만 관절을 보호할 근육과 호흡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계속 몸을 쓰고 더 잘 되는 쪽으로 모양을 잡다 보니 불균형이 생긴 것이다.


나는 뭐. 하하. 그냥 다 아프다. 운동하면 아프고, 운동 안 하면 더 아프고. 나 같은 사람에게 운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비가 오려나.






자신의 모습을 화면으로 담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동작 속에 얼마나 많은 불필요함이 숨어 있는지, 하지 않아도 될 긴장이 얼마나 몸을 묶고 있는지. 호흡은 종종 불규칙하고, 몸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 있으며, 왼쪽과 오른쪽은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하며 우열을 가른다. 우리는 이 불균형을 습관이라 부르지만, 실은 그것이 우리의 무의식이 만든 호흡의 풍경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느낀 것은 역설적이게도 요가를 할 때가 아니라 프리다이빙을 하면서였다.


사실 호흡이 전부일 수 있다. 호흡은 유일하게 의도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자율신경계의 통로이다. 깊고 규칙적인 호흡은 교감신경을 낮추고, 부교감신경을 활성화해 몸의 균형을 되찾게 돕는다. 횡격막 호흡은 단순히 산소 교환을 넘어 척추와 골반 주변의 깊은 근육들을 활성화시켜 자세 불균형을 줄여 준다. 한쪽 폐 용적이 더 적게 쓰이는 경우는 흔한데, 의식적인 호흡 훈련은 양쪽 폐와 늑골을 고르게 확장시켜 좌우 불균형을 줄여 준다.


숨은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얇은 경계라는 것을 물속에서 배웠다. 숨을 의식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물속에 있을 때 숨을 들이쉬고 내 쉴 수 없다는 강한 압박감은 숨을 의식하게 하고 곧바로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요가에서는 숨을 닻으로 사용하여 ‘지금, 여기’에 머물고, 프리다이빙에서는 숨을 끊음으로써 물속에 머문다. 요가는 의식을 안으로 확장하여 경계를 넓히고 다이빙은 물과의 경계를 최소화하여 나를 최대치로 밀어붙이는 경험이다.


이것은 단순히 기체의 교환이 아니라, 경계를 확인하여 숨을 인식하는 과정이다. 숨은 연속성과 단절성을 동시에 갖는 드문 현상일 수 있다. 삶에서는 이것을 느낄 수 없지만 숨을 물속에 갖고 들어갔을 때는 차이를 극명하게 느낄 수 있다. 요가와 프리다이빙은 서로 반대의 시간철학을 제시하면서도 결국 삶의 순간성을 드러내는 같은 실험이라 볼 수 있다.


요가는 나는 존재한다는 것을 숨의 연속성을 통해 경험한다면, 물속에서 숨을 쉬지 않는 나는 여전히 존재하는가 의문하게 되는 것이다.


숨의 리듬은 늘 잉여와 결핍 사이에서 이어진다. 들숨이 과하면 내쉬어야 하고, 내쉼이 길면 다시 들이마셔야 한다. 불필요함은 호흡을 흔들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고른 숨의 귀함을 배운다. 불균형이 없다면 균형은 느껴지지 않고, 불필요함이 없다면 필요함도 드러나지 않는다.





호흡과 아사나가 연결된 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면, 이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산스크리트어는 다층적이라 ‘이 말은 이것이다’ 하고 단정할 수 없다. ‘프라나’는 ‘숨’이면서 동시에 ‘생명력’이고, 더 깊이 들어가면 ‘우주를 관통하는 에너지’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과학과 멀어져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좁은 의미의 과학은 검증 가능한 가설에 기반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이 다층성이 어쩌면 현상을 한 가지 층위로만 단순화하지 않는 과학적 사유의 전단계와 유사해 보인다. 물리학에서 파동과 입자가 동시에 적용되는 것처럼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모순되는 개념을 병치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산스크리트어의 다층적 의미망은 이런 과학적 모순 수용과도 비슷할 수 있으나 나는 이것을 말로 설명할 재간이 없다.


6가지 반다 중에 하스타반다와 파다반다는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두 가지 반다도 다층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 언어이지만 과학적인 나만의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하스타(Hasta)는 '손'을 뜻하고 반다(Bandha)는 '묶다, 잠그다, 봉인하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그래서 '손을 묶거나 잠가라'라고 표현하면, '하스타반다를 적용하세요.'라고 했을 때보다 혼란스러울 수 있다.


손바닥은 체중을 지탱하도록 설계된 관절이 아니다. 바닥을 짚을 때는 반드시 하스타반다를 통해 팔의 근육을 최대한 활성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스타반다는 손목에 체중이 직접 실리지 않도록 하는 스위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상체가 체중을 지탱할 때는 어깨에서 팔꿈치, 그리고 손목 순서로 하중이 분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견갑골의 안정성이나 어깨 근육군의 안정성이 떨어지면, 어깨가 1차적으로 체중을 지지하지 못해 하중이 말단 부위인 손목에 집중되고, 이로 인해 통증이 발생할 수 있다. 우선 전완을 강화하는 운동을 통해 1차로 전완부 근육을 키우고, 2차로 하스타반다를 통해 어깨 주변의 근지구력과 견갑골 근육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근육은 운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무조건 커지는 것이 아니다. 피로 물질이 누적되면 오히려 근육 성장에 방해가 되므로, 매일 조금씩 꾸준히 습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뇌가 이 작업을 싫어하거나 몸이 거부하지 않도록 조절해야 한다. 매일 조금씩 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 손으로 바닥만 짚어도 관련 근육들이 자동으로 활성화되는 상태가 된다. 쉽고 편한 전완운동은 손가락으로 물을 터는 동작과 손을 꽉꽉 쥐는 동작이 좋다. 손목에 무리도 없고 효과적으로 전완 운동이 가능하다. 단 횟수가 중요하다. 100회 이상.


작은 뼈들이 정교하게 배열된 손목은 도구 사용과 섬세한 움직임, 다양한 방향의 기민한 동작을 위해 진화해 왔다. 그렇기에 손목 자체만으로 체중을 받으면 쉽게 통증이나 손상이 생길 수 있다. 손목이 아픈 경우 전완근의 힘이 약하거나 하스타반다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탓이다. 하스타반다는 손목에 집중되는 압력을 분산하고, 손끝과 전완, 어깨로 힘을 연결해 체중을 안전하게 분배한다. 손가락 끝으로 매트를 끌어당기며 모으는 힘, 손목을 살짝 들어 올리는 감각, 손끝에 실린 의식이 손바닥에 열린 아치를 통해 전신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설명을 하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회원들 귀에서 피가 날 수도 있다. 위의 문장을 체화할 수 있도록 압축한 버전이 있다. 수업은 그것으로 진행한다.


요가에서 사용되는 산스크리트어 구령은 단순한 명령이나 지시어가 아니다. 짧은 한마디 속에는 수많은 해부학적 지식, 몸의 기술, 그리고 철학적 통찰이 응축되어 있다. 하스타반다라는 말은 손가락 뿌리의 압력, 손목의 아치, 전완과 어깨로 이어지는 근육의 활성, 체중을 분산시키는 원리까지 모두 포함한다. 설명하자면 몇 페이지가 필요할 내용을 한 단어가 전부 불러온다. 이 언어는 몸과 뜻을 동시에 움직이며, 수행자의 감각 속에서 다층적으로 펼쳐진다. 요가의 산스크리트어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한마디가 지도이고, 그 지도가 펼쳐져 몸의 방향성을 지시한다.





호흡과 아사나가 연결된 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면, 이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가서.


호흡의 중심에는 횡격막이 있다. 횡격막은 들숨이 시작될 때 아래로 내려가며 흉강을 넓힌다. 이때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오고, 복부 장기는 밀려나면서 복부가 자연스럽게 부풀어 오른다. 우리는 이 작은 변화 속에서 몸의 깊은 확장을 느낀다. 반대로 날숨이 일어날 때 횡격막은 위로 올라가며 흉강을 좁히고, 복직근과 내늑간근이 수축하여 공기를 바깥으로 내보낸다.


아사나는 이 기본 원리를 확장시킨다. 전굴 자세에서는 상체가 접히며 복부가 압박되고, 날숨이 더욱 깊어지도록 유도된다. 반대로 후굴 자세에서는 가슴이 열리고 흉곽이 넓어지며, 들숨이 저절로 길어진다. 척추를 비트는 자세에서는 한쪽 폐가 압박되고 다른 쪽 폐는 더 크게 확장되는데, 이 좌우의 비대칭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던 호흡의 편차를 몸으로 드러내 준다. 각각의 아사나는 호흡 근육의 움직임과 흉곽의 공간을 바꿔 놓음으로써 호흡의 질감을 변화시키는 장치다.


더 깊이 들어가면, 호흡과 아사나가 연결된 감각은 단순히 근육의 움직임에 국한되지 않는다. 들숨 동안 횡격막이 내려가며 생기는 복강 내 압력은 척추를 안정화시키고 요추를 보호한다. ‘중심이 단단해졌다.’는 감각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횡격막은 미주신경과 연결되어 있어 깊은 호흡이 이루어질 때 심박수와 긴장이 함께 조절된다. 요가가 운동이 아니라 수련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호흡과 자세가 하나로 맞아떨어질 때 느끼는 안정감은, 실제로는 자율신경계가 균형을 되찾는 순간이기도 하다.


호흡과 아사나가 연결된 감각을 해부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그 감각을 온전히 느낀다는 것은 설명이나 지식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설명은 가능하더라도, 체험은 여전히 주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호흡과 아사나가 맞닿는 순간의 미묘한 일치는, 과학의 언어와 체험의 언어가 서로 다른 차원에서 같은 진실을 말하는 장면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물속에서의 호흡 정지는, 요가에서 호흡의 본질을 극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과정이다.


지상의 문이 닫히는 순간, 모든 소음은 사라지고 오직 나와 숨만이 남는다.













사진출처: unsplash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18화마리오네트의 성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