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마디 같은
예약률의 맹점
10년 된 강사건 1년 된 강사건 어떤 고민은 비슷하다.
수업 예약자 수가 유난히 적은 날, 직전 수업에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은 것이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회원과의 대화, 그날의 수업진행방식, 시퀀스, 핸즈온(회원의 몸을 터치해 방향성을 유도하는 적극적인 티칭방법)에 이르기까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그날의 내 실수’를 뒷담화해 본다.
월요일 스트레칭 수업을 담당하는 강사님은 '지옥에서 온 사람'처럼 떠들었다고, 질려서 안 오는 거 아니냐며 속상해하고, 동기강사님은 늘 자신의 자질부족에 대해 말하며 울상을 짓는다. 가장 상처가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10년 차 강사님. 웃는 얼굴로 잊히지 않는 일화들을 하나씩 풀곤 하는데, 겉으론 괜찮은 척 보여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모양이다. 자신의 수업시간만 골라서 나오지 않는 회원, 다른 강사와의 끊임없는 비교, 자질에 대한 논란은 말할 것도 없다. 말하기 꺼려지는 숱한 일화들의 강사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이쯤 되면 그날 예약 수가 적은 이유는 뒷전으로 밀리고, 서로 실수를 톺아보는 장이 되어버린다.
한 번은 이런 회원도 있었다.
"다리를 벌리고 앉습니다.", "누운 상태에서 다리를 골반너비만큼 벌리세요."
어떻게 들리세요?
수련 시간에 무엇을 상상하건 자유지만 '벌려'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것을, 불쾌함에 관해 한 시간 내내 말한 회원도 있었다. 그 후 요가원에서는 '벌려'라는 말 대신 '열다'라고 표현한다. 한 사람의 회원에 의해 특정 단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다 지난 일임에도 단체로 '벌려' 트라우마 간접체험 중이다.
내 경우는 단순하다. '회원님들이 나 싫어하나 봐.'로 시작하여, '거봐. 나 싫어하는 거 맞잖아.로 끝낸다. 이 말을 꺼낼라치면, 주변의 반응은 '그럴 리가 있냐'는 표정. 동기강사는 우는 아이 달래듯 씩 웃으며 "난 쌤 많이 좋아해."라고 답해준다. '불안이'는 약해질 때 잠시 들러 '잘 살고 있나 보러 왔다만?' 하는 짓궂은 손님이기도 하니깐, 각자의 불안이 지나갈 때까지 잠시동안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기로 한다.
출석이 가장 저조했을 때는 대강 나간 아파트커뮤니티에서의 수업이었다. 단 둘 뿐이었다. 한 분은 5분 전에 도착해 처음 보는 나와 마주 앉아 서로 겸연쩍게 웃고 있었고, 다른 한 분은 수업 시작 후 5분 뒤에 도착하였다. 먼저 도착한 한 분의 회원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늘은 개인레슨을 하게 되었으니 저도 회원님도 운이 좋은 날이네요.' 말씀드렸더니 어색하게 웃고 계셔서 난 뻘쭘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5분 뒤에 도착한 또 다른 회원님 덕분에 개인레슨은 2:1 레슨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그날 수업은 1시간 20분 정도 진행되었으니, 운수 좋은 날인 건가, 잘못 걸린 날인 건가. 아무튼, 그분들과의 수업은 그것이 마지막이었으니 후에 어떤 평가를 내렸는지 알 수 없다. 대강을 나간 곳이니 낯선 강사에 대해 알 길이 없는 것은 그분들도 마찬가지였을 테니.
수업할 때 긴장을 하지 않게 된 중요한 순간이 있다. 관점의 이동.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아낌없이 나누자'는 마음으로 임하니, 보여주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로 보였고, 긴장은 그 사이에서 어느덧 힘을 잃었다.
예약률의 저조한 이유도 관점을 이동해 보면 다르게 볼 수 있었다.
물론 강사의 수업 스타일이나 지도 방식이 회원의 기대나 취향에 맞지 않을 수 있다. 회원들은 강사의 전문성, 소통 능력, 수업 분위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그래서 관점을 맹점이라 비틀어본다. 무엇을 보겠다고 시선을 모으는 순간, 동시에 보지 못하는 자리가 생기는 맹점. 예약률이라는 수를 내 실력의 잣대로 삼으면, 다른 수많은 변수들은 가려진다. 회원의 사정, 계절의 변화, 그날의 단순한 기분까지 다 맹점으로 밀려나 버린다. 수련을 마치고 여유가 있는 회원님과 차를 나눠마시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맹점이었음이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몸짓 하나, 숨 하나가 내게 주는 메시지에 집중할 때 비로소 내 역할이 무엇인지 조금은 명확해진다. 예약률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매 순간 수업을 함께하는 경험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마흔의 맥락
어떤 이는 나이 듦을 사형선고처럼 받아들인다. 마흔, 예순 같은 숫자를 무슨 불치병처럼 여긴다. 적대감의 원인은 내 기억 속의 마흔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노화의 흔적일 수도 있지만, 닮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의 얼굴일 수 있다. 노화를 긍정하는 것은 마흔이라는 숫자를 체념하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반면 나이 먹음을 반기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과거를 곱씹거나 그리워하지 않고 현재의 나를 기꺼이 반긴다.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그들의 대답은 고생한 시간을 무로 돌릴 수 없다는 자부심이다. 그들의 주름은 얼굴 위에서 춤을 추듯 살아 있다.
맥락이란 흐름과 연결을 통해 드러나는 구조다. 마흔은 그런 나이다. 숫자로는 설명되지 않고, 관계와 연결 속에서 의미가 생기는 시기다. 우리는 숫자의 명확함에 기대 자신을 한 칸에 욱여넣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 칸 사이의 흐름이다.
내게 마흔은 삶의 마디 같았다. 저지대와 고지대, 흩어지는 시간과 모아지는 기억이 서로 얽히는 이음 속에서, 나는 나 자신과 세계를 잇는 자리들을 발견한다. 고리처럼 연결된 하루하루, 돌막이처럼 잠시 붙잡은 순간, 잇대처럼 이어진 사유는 나를 흐름 속에 놓아두면서도 의미를 남긴다.
요가의 나바아사나(Navasana)
'나바'는 배를 의미하며, '아사나'는 요가의 동작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앉음 그 자체’를 의미한다. 숨이 흐르도록 척추를 곧게 세워 중심을 잡는다. 골반에 실린 무게 중심은 다리와 상체를 균형 있게 연결하여 끊임없이 미세 조정된다. 코어의 힘은 팔과 다리의 선을 연결하여 하나의 흐름으로 만든다.
흔들림 속에서 균형을 찾는 시기, 앞뒤로 기울지 않고 자기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바사나처럼 흔들림을 감추지 않고, 그 안에서 중심을 찾는 것이 마흔의 맥락과 매우 닮아 있다. 사마트바는 숫자와 극단을 넘어 균형을 이룸을 뜻한다. 사마트바는 나바사나의 핵심이다.
세상을 숫자로만 보지 않는 것은 명확성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수에 기대어 삶을 이해하려는 습관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예약에 두 명의 회원님은 2라는 수이기에 앞서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이다. 오늘도 나와 인사를 나누고, 서로가 잘 되길 잠시나마 바라는 마음과 마음이 연결된 존재이다.
회원수는 참여의 본질을 나타내긴 하지만 어딘가 얄팍하고, 마흔이라는 숫자는 나이의 맥락을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이제 꽉 찬 마흔을 하루하루 살고 있다. 멀지 않은 오십의 첫 항해에는 가득 실었던 짐을 훌훌 던져버리고, 더 가벼이 그래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도록 지금은 조금 더 채우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는 기록일 뿐, 의미는 맥락 속에서 자란다. 흐름과 연결 속에서 우리는 삶을 다시 바라볼 수 있다. 수치가 아니라 관계, 효율이 아니라 경험, 연령이 아니라 맥락, 수의 자리를 비워낼 때 비로소 세상의 경계는 확장되고 빛은 조금 더 선명해진다.
관점으로 보면 나이의 무게가 드러나지만, 맹점이었다 인정하면 숫자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맥락이 선명해진다. 본다는 건 보지 못함을 동반하고, 그 볼 수 없음을 자각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시선은 조금 더 확장된다.
나이를 맥락으로 본다는 것은 변화를 허락지 않는 근원 속에서 부동의 중심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속성 없음이 오히려 실재의 빛을 드러낸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변화와 소멸을 초월한 고요, 그것은 영상 하나 걸리지 않은 빈 스크린 같다. 바다는 파도를 내보내지만 스스로는 일렁이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흔들림을 품으면서도 스스로 흔들리지 않는,
고요의 바다.
다만 오늘 내가 선택한 나는 오고 가는 바람 같아 머물지 않는다. 한순간 일어났다 곧 가라앉고, 태어났다 다시 스러진다. 붙잡으려 해도 실체는 흩어져 흔적만 남는다. 끊임없이 변하고 동적으로 흐르며, 스크린 위에 상영되는 영화처럼 잠시 빛나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바다 위로 이는 파도, 그것이 오늘 선택한 나의 실체이다. 일렁이며 부서지고 흩날리지만,
바다를 다 채울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