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명랑과 희망이라고 적었다

그래놓고 또.

by 요인영



분명 명랑과 희망이라고 적었다. 연재글의 방향성에 <어깨를 외회전하는 삶>-희망차게, <행복한 발가락>-명랑하게.


뭐든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못하는 때이다. ‘이 정도면 괜찮지.’ 생각하며 주위를 들러보면, 어느 사이 주변은 비어있고, 눈빛은 낯설다. 아직도 스스로 갇히길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피하려는 걸까. 그마저도 알 수 없다. 이 글은 글쓰기에 관한 것이기도, 요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삶의 밝은 면보다 어두운 면에 더 끌린다. 무거운 주제, 우울, 존재의 이면, 그로 인해 생각을 곱씹게 하는 것들. 이런 과정에서 기쁨을 느낀다. 한쪽 발은 늘 어둠에 걸쳐 있다. 그렇다고 어둠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든 그 속에서 빛을 끌어내려 애쓰는 모습도 나다. 비교적 균형 잡힌 감정의 숲에 일시적인 우울이 빛처럼 고여 있다. 우울은 도깨비불처럼 종잡을 수 없지만 그 역동성이 나를 살아 있게 하는 힘이다. 실수를 상기시키고, 상황을 바로잡게 도와주고, 집착하지 않게 해 주며, 현재에 머물게 하는.


존재 이면의 어둡지만 밝은 빛.


요가원을 다니면서 이 양면성은 더욱 선명해진다.

늘 시끌시끌한 요가원. 왜 많고 많은 요가원 중에 그곳을 택했을까. 우렁찬 목소리의 요가 선생님, 역동적인 인사이드 플로우, 생각의 틈을 허용하지 않는 상세 설명, 그리고 외향적인 사람이 내뿜는 에너지가 가득했다. 나와 정반대의 기운을 가진 사람들이 요가원의 다수를 차지한다.

결국 나는 다시 인요가와 명상 같은 조용한 수련으로 흘러갔지만, 그 강렬한 에너지를 놓지는 않았다. 그것도 내 모습이었으니까. 겉으로는 비켜서 있는 듯 하지만 사실상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도 이제는 불가능하다. 선생님들은 늘 외친다. “왜 거기 이쒀! 이리왓!!” 대개 터프한데, 대개 섬세하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목적이 분명했다. 명랑하게, 간결하게, 쉽게, 미사여구 없이, 가독성 높은 글을 쓰겠다 다짐했다. 그런데 막상 쓰기 시작하면 문장은 길어지고, 관념이 꼬리를 물며 늘어졌다. 애초의 목적과는 멀어져도 한참 멀어진 글쓰기가 되어버린다.


여기가 어디더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요가원에서도 결국 내 성향에 맞는 길로 흘러갔던 것처럼, 글도 나답게 흘러간 것뿐이다. 밝고 명랑하게 쓰고 싶었지만, 복잡하고 무거운 글이 나오는 이유도 결국은 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점검이 필요한 이유는 계속 써야 하니까.



스크린샷 2025-09-12 225953.png



반다는 산스크리트어이다. 산스크리트어는 어감이 참 아름답다. 발음을 해보면 입안에 오래 머금고 있게 된다. 반다를 한번 발음해 보시라. 입을 곧장 다물 수 없고 여운이 길게 남는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은 나가지 못하게 묶고, 잠그는 고정의 의미를 갖는다.


호흡은 늘 흘러간다. 들고, 내쉬고, 흩어진다. 그 흐름을 잠시 멈추어 붙잡는 순간이 있다. 그때 몸 안의 문 하나가 닫히고, 에너지가 고여 머문다. 요가에서 그 문을 ‘반다’라 부른다. 또 반다는 잠금이면서 동시에 열림을 뜻하기도 한다. 세상을 향해 흘러나가 버리는 기운을 안으로 붙잡아, 몸과 마음이 다시 나를 바라보게 만든다. 흩어져 있던 내가 한 곳에 모일 때 비로소 고요한 힘이 생겨난다. 발음은 자유를 꿈꾸고, 뜻은 속박을 말한다. 그 모순이 어쩐지 삶과 같다. 붙잡고 싶으면서도 흘려보내야 하고, 흘려보내고 싶으면서도 끝내 묶어두고 싶은 것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15화다이어트를 대하는 요가인의 자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