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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특별한 문체를 갖는 사람

명상하는 삶

by 요인영



“러너가 되어주지 않겠습니까?”라는 누군가의 부탁으로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 건 아니다. 누군가로부터 “소설가가 되어주세요”라는 부탁을 받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닌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가 좋아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좋아서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말려도, 모질게 비난을 받아도 내 방식을 변경할 일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누구를 향해서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의 삶은 특별한 문체를 갖고 있다. 하나의 예술처럼 느껴지는 그의 작업과 삶의 방식은 영감을 주고 그래서 아름답다. 그는 이른 시간에 일어나 오전 내내 글을 쓴다. 위장에 부담이 가지 않는 재료로 식사를 한 그는 오후시간은 몸을 쓰며 보낸다.


하루키는 "나는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달리기를 통해 체력뿐 아니라 사고의 리듬과 내면의 평정을 유지한다.


소설가는 이야기의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전달하지만 하루키의 진정한 철학은 그의 생활방식에서 보이는 듯하다. 그의 소설 속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과 내면을 탐구하는 자의 시선이 늘 있다. 그 시선의 끝에는 달리는 그가 시계추처럼 진자운동을 한다.


하루키는 달리기를 명상이라 부른다. 땀에 흠뻑 젖어 홀로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그것이 작품의 모티프가 된다. 시계추처럼 반복되는 그의 발은 문장의 리듬처럼 그의 창작의 박자를 지원해 주는 메트로놈이다.


언뜻 보면 루틴은 자신의 생활방식에 고착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습관이나 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마음이 넓어서가 아니라 시작점에서 그것이 자신의 취향이나 마음에 들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매일 루틴을 실천한다는 것은 꼭 마음에 드는 상황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수용하기 위한 마음가짐의 훈련이다. 결국 매일 반복되는 루틴은 순간순간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까지도 내면에서 고착되지 않게 하려는 시야와 마음을 키우기 위한 치열한 노력의 연속인 것이다.


반면 이런 일상도 있다.


시계가 울리기 전이라도 훌쩍 일어나 있거나, 한참 지난 후에야 침대에서 일어나는 날도 있다. 하루가 언제 시작되는지 오늘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날이 많다. 햇살이 어지럽혀진 방안을 비추고 다시 감출 때까지 그는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오늘과 어제, 계획과 현실은 서로 뒤엉켜 혼돈 속에 놓여 있다.


업무와 휴식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없다. 일정을 확인하다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고 산책을 나갔다가 미처 끝내지 못한 글을 다시 붙잡기도 한다. 시간의 흐름은 일정하지 않고 그는 그 흐름 속에서 스스로 균형을 찾는다. 하루의 시작과 끝은 외부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선택과 감각이 결정한다.


때로 그는 주변의 규칙과 기대에 끌려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삶의 핵심을 정의하지는 않는다. 루틴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규칙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의 흐름을 믿고 매 순간 다른 하루를 살아내는 방식이다. 혼란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움직이며 예측 불가능한 하루 속에서 작은 질서를 찾아낸다.


그의 삶은 파도처럼 혹은 바람처럼 흐른다. 정해진 틀에 얽매이지 않아 자유롭지만 그만큼 매 순간 집중과 결단이 필요하다. 루틴은 없지만 그가 만든 리듬은 느슨하고도 탄탄하다. 혼돈 속에서 스스로를 지탱하는 방식, 그것이 바로 그의 하루를 빚는 힘이다.





두 세계는 겉으로 보면 정반대처럼 보인다. 하나는 시계처럼 정확하고, 반복되는 의식 속에서 하루를 견고하게 세운다. 다른 하나는 바람처럼 자유롭고 예측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순간순간을 살아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공통선이 흐른다.


두 삶 모두 자신만의 중심을 가지고 있다. 하루의 시작이 정해져 있든, 아니면 불규칙하게 흘러가든 그 중심은 외부가 아닌 자신에게 있다. 반복과 의식 속에서 자신을 다듬는 이들은 새벽의 고요 속에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혼돈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예측 불가능한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조율한다. 어떤 방식이든 자기 삶을 책임지고 지탱하는 힘이 존재한다.


그러나 차이점도 분명하다. 루틴 있는 삶은 안정감과 예측성 속에서 강해진다. 하루를 계획하고 의식과 습관을 반복하며 작은 성공과 질서를 쌓아 올린다. 반복 속에서 느껴지는 만족감과 평온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처럼 삶을 단단하게 붙든다. 반대로 루틴 없는 삶은 유연함과 즉흥성 속에서 강해진다. 언제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는 하루 속에서 그는 선택과 판단의 근육을 키운다. 매 순간 변화에 적응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건 속에서 스스로 균형을 잡는 법을 배운다. 안정적이지 않지만 그만큼 자유롭고 새로운 가능성에 열려있다.


두 세계는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같은 목표를 향한다. 자신을 지키고 하루를 살아내며 삶을 완성하는 일 하나는 정교하게 짜인 지도 위에서 걸어가고, 다른 하나는 지도 없이도 별과 바람을 따라 길을 찾는다.



싱잉볼 명상



요가로운 삶은 루틴 없는 아래의 일상보다는 하루키의 삶에 가깝다. 그들은 그런 반복되는 일상으로 몸과 마음을 조각하는데,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면 자연과 닮는다. 요가가 자연을 닮은 것인지 자연을 묘사한 것인지 한결같이 그런 인상이다.


요가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늘 곁에서 함께 수련하는 회원님이 명상을 해보고 싶다 요청이 있어 한 시간 가량을 마음챙김 호흡명상으로 안내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빈 도시락통 달그락달그락.

운동화 직직 끌다가 내 발 걸려 넘어져 울지도 못하고 절뚝대며 돌아오던 어린 내가 떠오른다. 깨진 곳은 무르팍인데 볼때기가 더 화끈대던 그런 날. 외로움인지 서러움인지 알다가도 모를 감정이 재채기하듯 튀어 오른다. 다른 이의 마음을 정성스레 챙겨 준 후의 후유증인가. 그렇다면 이 일도 나와 맞지 않는가. 하는 배부른 고민을 하는 것이다.


마음을 터 놓을 만큼 먼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지척은 늘 복작거려도, 어디 하나 기댈 곳이 없다. 털어놓고 나면 후회가 강물처럼 흘러서 마음챙김 명상도 묵직한 잡념주머니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이다.


스트레칭이나 요가로 풀 수 없는 긴장의 유형이 있다.

그것은 흉터이다.


근육을 싸고 있는 파시아(근막)의 면이 달라붙어 버린 흉터는 살이 오래 기억하는 문장과 같다. 살과 살이 맞닿는 자리에서 남겨진 파문처럼, 세계와 내가 스치고 부딪히던 순간이 고요히 새겨진 흔적. 세계의 살이 내 몸을 통해 되비치듯 흉터는 나만의 것이면서 동시에 세계가 내 안에 남겨둔 무늬다.


명상시간에 누군가의 흉터와 아픔이 되비쳐 내 것이 된 것은 아닌지 흐린 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이 가느다란 금은 어쩌면 누군가의 삶 전체의 흐름이 숨겨져 있다. 때때로 그 결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마음챙김이란, 흉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속에 숨어 있는 깊은 결을 받아들이는 일임을 배운다.


명상의 시간은 촘촘히 짜인 시공 안에 바닥이 지지하는 감각을 서로의 무게로 실감하며, 더 짙은 흉터와 더 무거운 마음 쪽으로 다 같이 기우는 시간.


한 시간 동안 내가 안내한 말들은 어쩌면 나와 모여 앉은 이들의 지각을 예리하게 조각하여 적극적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일이었을지도. 내 말이 그들에게 닿았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내게는 확실히 닿았음을 휘청거리며 알게 된다. 이 결맞음 속에서 나는 겪지도 않은 마음의 파편들을 떠올린다. 각각의 감정, 기억, 흉터가 제각각 흩어져 있지만 선과 면처럼 서로를 만나고 조화를 이루는 순간, 깨어진 듯한 마음도 잠시 균형을 얻는다.






마음이 힘들어 명상하는 이들을 찾아보았다.


혹여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때처럼 상대의 결핍의 순간을 가만히 기다려본다. 요가가 단단한 기반을 만드는 것인지 단단하여 결국은 요가를 하게 되는 것인지. 새의 뼈와 같은 결핍이다. 새는 날기 위해 뼈의 밀도가 낮은 사람처럼 속이 비어 있다. 빈 공간은 공기로 채워진다. 그는 바닥에서도 새처럼 가볍고 자유롭다.


혹여나 나도 모르게 눈빛이 변하여 과거의 욕망이 드러나는 것은 아닌지 상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한다. 요가를 하면 물의 표면처럼 되는 것인지 물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요가를 하게 되는 것인지. 푸른색으로 보이는 물은 욕망이 남긴 흔적이다. 다른 빛을 모두 흡수하고 소유할 수 없는 것에 의해 자신의 색을 드러낸다.


소유할 수 없는 것으로 존재를 드러내려면 나의 부족함과 한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든 감정들은 나의 한계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처음에 이런 감정들의 원인을 단순히 지식욕이나 인정욕구로 돌렸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채워도 채워도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아쉬움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 일, 하고 있는 일, 터득한 것들, 경험에서 얻은 작은 진리의 조각과 순간의 통찰. 이것에 만족할 수 없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내가 도착할 곳은 명상하는 삶인데, 결국은 나도 이들과 닮아 내가 보는 자연과 비슷해질까 알 수 없지만, 언젠가 그랬으면 좋겠다.


뼈가 가벼워 날 수 있는 새처럼, 내가 만들어 놓은 기준선을 가뿐히 넘어 그랬으면 좋겠다.


소유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빛나는 물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



Alice Dalton Brown, 주관적 사실주의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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