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는 말에 멈췄던 시간
요즘 누군가에게 “요가하는 사람”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바싹 마른 남자를 떠올리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 여성, 가느다란 몸, 과도한 유연성, 어쩐지 아련한 감성과 필터 낀 사진 같은 이미지를 먼저 그릴 것이다.
요가를 시작하면서 몸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꼈고, ‘강사’라는 길을 염두에 두었다. 그때 자주 만나던 친구에게 가볍게 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자체가 실수였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람과는 오래 걸을 수 없으니까. 그 친구는 듣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넌 다리가 짧아서 안 돼.”
늘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걸러지지 않은 말을 바로 내뱉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은 이상하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 말에 상처를 입고, 강사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렸다. 스스로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 누가 배우고 싶어 할까.”
목이 짧다, 손가락이 짧다, 상체가 짧다. 이런 말은 그냥 흘려듣는다. 그런데 다리가 짧다는 말은 묘하게 “넌 못생겼다.”라는 말과 어감이 겹친다. 그 친구는 늘 그런 식이었다. 생각 없이 툭툭 내뱉고, 특히 나에겐 필터조차 거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옆에 두었다. 왜? 그때의 나는 친구란 그래야 한다는 온전치 못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친구도 몇 없으니 연락이 오면 한숨 쉬며 그래도 만나러 나갔다. 습관처럼.
시간이 한참 흐른 뒤, 2년 전쯤 또 다른 친구에게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그 친구의 대답은 달랐다.
“난 상관없을 것 같아. 아무래도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좋지. 몸은 몸이고, 가르치는 건 또 다른 문제 아닐까?”
과거의 친구도, 지금의 친구도 결국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한 건 같다. 하지만 한 사람의 말은 나를 좌절하게 했고, 다른 한 사람의 말은 멈춰 있던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호주에서 요가지도자 과정을 지도하는 나의 선생님은 현대무용을 전공했다. 그 사람은 자신의 굵직한 몸 선 때문에 콤플렉스를 안고 살았다. 무용은 텅 빈 공간에 자신의 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예술인데, 선이 굵으면 세밀한 묘사가 어렵다 느껴졌던 것이다. 생활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요가를 만났고, 자신의 길을 발견했다. 상체에 비해 두꺼운 다리와 두툼한 발바닥이 오히려 요가에서는 장점이 된다는 것을. 힘과 유연성을 바탕으로 어떤 자세도 안정감 있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사람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요가에 강사만 더했을 뿐인데, 내가 부딪힌 건 ‘요가’가 아니라 ‘내 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 몸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었다. “넌 다리가 짧아서 안 돼.” 그 말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다. 나를 어떤 자격에서 배제하는 선언처럼 들렸다.
길다, 짧다, 예쁘다, 못생겼다. 이런 단어들은 사실 객관적이지 않다. 모두 사회가 만들어낸 기준 속에서 나온다. 다리가 짧다는 건 단순한 신체적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이 내 귀에 ‘너 못생겼다’로 들린 건 사회가 이미 “길고 날씬한 다리=아름다움=자격”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몸은 태어난 그대로의 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늘 사회의 코드 속에서 해석된다. 내가 가진 신체는 그냥 신체가 아니라 ‘누군가 부여한 평가’와 함께 굴러다닌다.
강사라는 자리는 조금 다르다. 사람들 앞에 서야 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때 몸은 단순히 몸이 아니라 ‘권위의 기호’가 된다. 수련생들은 강사의 몸을 보고 실력을 짐작한다. 실력은 눈에 잘 안 보이니까, 대신 눈에 잘 보이는 몸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사의 몸은 곧 권위를 대표하는 표지판이 된다. 누군가 “넌 다리가 짧아서 안돼”라고 말했을 때, 사실은 내 몸이 강사의 권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선을 긋는 셈이다. 요가라는 가르침보다 몸의 모양새가 권위를 점령하는 순간이다.
누구의 입에서나 쉽게 흘러나오는 말들이 있다. “살 빠졌다”, “다리 길다”, “피부 좋아졌다” 칭찬인 듯 하지만 대부분은 평가다. 우리는 인사 대신 상대의 몸을 이야기한다. 마치 몸을 말하지 않으면 대화가 시작되지 않는 것처럼.
“넌 다리가 짧아서 강사는 안 돼”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게 단순한 개인의 무례가 아니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것은 사실 사회 전체가 매일같이 쏟아내는 ‘몸평’의 한 조각이다. 우리 사회는 몸에 대해, 구역질이 날 정도로 끊임없이 말한다. 단지 묘사가 아니라 자격을 판정하는 언어로.
몸평은 단순한 농담이나 습관이 아니다. 그것은 규범을 강요하는 장치다. 버틀러가 말하는 규범적 몸이라는 개념처럼, 사회는 이미 ‘이래야 한다’는 몸의 틀을 세워 놓았다. 길고 마른 몸, 탄력 있는 몸, 젊어 보이는 몸. 그리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몸은 결격, 심지어 결함으로 여겨진다. 결국 몸평은 “너는 규범에 맞는다와 맞지 않는다”라는 판정을 일상어로 내리는 방식이다.
특히 연예인, 공인 같은 사람들에게 몸은 실력이나 인성을 대신하는 기호로 소비된다. 요가 강사의 몸은 실력을 보여주는 표지판이 되고, 가수의 몸은 실력을 판단하는 잣대가 된다. 요즘은 인성까지도 함께 평가된다. 공인은 얼굴, 몸, 성격, 도덕성까지 모두 규범에 맞아야 한다는 것.
이쯤 되면 우리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미리 정해놓은 매뉴얼에 따라 감점과 가점을 매기는 심사위원이 된다. 몸평은 결국 타인을 평가하는 권력을 우리 손에 쥐여주는 듯하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을 옥죄는 규범을 강화할 뿐이다.
몸은 늘 말에 둘러싸여 있고, 권위를 대신하는 기호로 소비되지만, 동시에 새롭게 재구성될 수도 있다. 문제는 내가 어떤 시선으로 나의 몸을 읽을 것인가이다. 누군가는 내게 ‘너는 안돼’라고 말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잘 가르치는 사람이 좋은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두 말 다 결국 몸을 두고 한 말이지만, 한쪽은 내 몸을 사회적 기준에 가둬버렸고, 다른 한쪽은 그 기준을 무력화시켰다. 몸은 나를 규정하는 굴레일 수도 있고, 나를 확장하는 가능성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경계는 언제나 언어와 시선,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다시 쓰인다.
오늘도 달린다.
뽈뽈대며.